- 집단이란 개인의 집합체입니다. 그리고 집단화는 이데올로기로 빠지게 되죠. 우리가 필요한 것은 위대한 개인입니다. 깨어있는 개인이 많아져야 합니다. 서울대도 개인을 기르는데 집중해야 합니다. 자신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모두가 이데올로기에 빠지고 있습니다. 기원전 5세기 그리스 비극작가들이 했던 일이 바로 이타심과 연관된 민주주의 교육이었습니다. 철학자 플라톤은 철인정치를 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당시에는 철학과 문학이 싸웠죠. 문학은 대중교육을 통해 민주주의가 가능하다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대중교육이란 그리스 비극을 뜻합니다.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의 살라미스 해전을 다루고 있는 그리스 최초의 비극인 아이스퀼로스의 <페르시아인들>에는 그리스 사람이 한 명도 나오지 않습니다. 이 비극에는 크세르크세스라는 페르시아 왕이 등장하는데, 극중에서 크세르크세스가 잘못을 시인하며 우는 대목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인들은 자기 아버지, 자식을 죽인 왕이 울자 다 같이 웁니다. 이것이 바로 카타르시스를 통한 교육인 것입니다. 남의 입장에 서보는 동정(compassion), 이타심을 갖지 않으면 민주주의는 불가능합니다. 최근 원전 추가 건설에 대한 논의를 숙의 과정을 통해서 결정한 바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이런 숙의과정이 필요합니다. 숙의가 정착되지 않으면 사회나 개인에는 희망이 없습니다.
- 우리 사회가 너무 경쟁을 강조했기 때문입니다. 자기 생존만을 강조한 것이죠. 서울대 역시 수월성만을 생각합니다. 자기 입장에서만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는 훈련을 해야 하는데, 이 때 필요한 것이 바로 명상입니다. 명상은 앉아서 침묵하는 것뿐만 아니라 나를 다른 사람의 눈으로 보는 훈련을 뜻합니다. 그것이 바로 교육이죠. 여러 학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천문학은 달의 입장에서 세상을 보는 것이고, 해양학은 물고기의 입장에서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배우지 못 한 사람은 자기 편견만을 강화하죠. 한국 사회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 바로 이런 점입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자기 무식을, 즉 편견을 강화하려 공부하고 그 이유 때문에 서울대 역시 비판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 애초에 이타심을 중요하다고 배운 적이 없습니다. 지금까지 경쟁만 해왔죠. 이타심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의미에서 베풀고, 사랑하는 것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 입장에서 나를 보는 것이 이타심입니다. 조선은 소수가 결정을 내리는 왕정이었기 때문에 이타심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민주주의란 동정(compassion), 즉 공동의 입장에서 세상을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특히 어려운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위에서 언급한 문제들이 통용되고 논의될 수 있는 공동체의 조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사회에는 아직 그런 공동체가 없습니다. 방송, 신문, 교수 공동체에서조차도 그런 공동체가 없고 만들 생각도 없습니다. 자기가 스스로 무언가를 만들지 못 하고 있으며 지식인들 역시 무기력한 상태입니다. 저는 건명원을 통해 시스템 밖에서 다른 것을 시도해보려는 것입니다.
- 왕정 문화가 전 정부까지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회복하기 위해 이 정부도 어느 정도 포퓰리즘적 태도를 보일 수 밖에 없습니다. 중심을 잡아야 나아가야 합니다. 아직도 우리는 조선시대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지 못 하고 있습니다. 이를 뛰어넘어야 합니다. 북유럽 국가들은 이러한 과정을 거쳤습니다. 이들에게 중요한 건 질서, 예의, 상대방에 대한 배려입니다. 자유, 인격적 대우를 중요시 한다는 것이죠. 우리는 그런 것을 경험한 적이 없습니다. 몇 사람이 모든 것을 하는 왕정 국가였기 때문이죠. 학생들 역시 거기서 어떻게 살아남을까 눈치를 보고 있죠. 그렇기 때문에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자기 자신에게 집중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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