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소식) [아너스 프로그램 수기] 언어학과 진채은
사건 해석에서의 유표성과 인과를 중심으로 (언어학과 진채은)
안녕하세요, 언어학과 진채은입니다. 어디 가서 이렇게 소속을 포함한 뻔한 인사를 하면, “그렇군요”라는 손쉬운 수긍보다는 “언어학과는 뭘 하는 데예요?”라는 질문이 돌아옵니다. 눈동자에서 물음표가 보이는 듯한 상대방을 앞에 두고, 저는 부족한 식견으로나마 머리를 열심히 굴려봅니다. 정체성은 때로 구별 가능성으로 정의되기도 하므로, 저는 그 질문을 어학을 공부하는 인문대학의 다른 어문 계열 학과들과 구별하려는 시도로 읽습니다. 결국 저는 “개별 언어보다는 인간의 언어 능력이나 현상에 관해 공부합니다.” 하고 간편히 답합니다.
간편한 대답은 가끔 제 안의 반항심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럴 때면 ‘내가 뭘 안다고 언어학을 규정짓고 있어?’ 하는 자조, ‘내가 말하는 인간의 언어 능력과 언어 현상은 도대체 무엇을 지칭하는 거야?’ 하는 까끌거림이 대뜸 제 자기소개와 함께하는 셈입니다. 필요 이상의 정보를 제공하지 말라는 양의 격률은 지켰지만, 진실한 정보를 제공하라는 질의 격률을 지켰는지 의심한다고 할 수 있을까요.
이번 아너스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연구한다는 것은 이런 까칠한 불안과 의심을 곤두세우는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이번에 연구한 주제는 문장구조가, 혹은 때로 그 길이가 고작 몇 밀리초에 불과한 접사가 인과관계를 판단하는 데 영향을 미칠 수 있을지에 관한 연구였습니다. 언어 현상으로서 한국어 접사에 초점을 두었고, 그에 따른 인과관계 파악 양상에 차이가 있을 수 있는지를 확인하고자 실험 연구를 수행하였습니다. 실험 참여자들은 짧은 시간 동안 문단을 읽고, 문단 속에서 어떠한 결과를 일으킨 행위주(agent)가 누구인지 기억하는 과제를 수행하였습니다. 각 문단은 접사의 유무, 문장 내 논항의 구조, 행위주의 유정성(animacy)에 따라 8가지 종류로 달랐습니다. 흥미롭게도 사동이든 피동이든, 문장이 어떠한 논항 구조로 되어 있든, 행위주가 살아있든 아니든, 참가자들은 ‘이’ 계열 접사가 있을 때 행위주를 더 잘 기억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제 연구는 지도교수님이신 언어학과 정선우 선생님의 논문 「Causatives and Inchoatives in Korean: A Unified Account」와 수업 <실험언어학>에 크게 기대고 있습니다. 간편히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과 함께 설명하자면, 선생님께서는 해당 논문에서 피동과 사동에서 대칭적으로 나타나는 ‘이’ 계열 접사가 인과관계와 관련된 유표적인 해석을 걸러내는 역할을 한다는 분석을 하셨습니다. 저는 그 이론을 실험적으로 입증하려고 한 셈인데, 구조적으로 설득력 있는 교수님의 이론을, 실험 데이터를 통해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 참으로 설레는 작업이었습니다. 또 선행 연구들과의 비교를 통해 유정성과 의도성, 책임과 인과가 다른 방식으로 이해되어야 함을 확인할 수 있었고, 선학들이 언어와 인간의 사고에 대해 했던 말들을 곱씹어볼 수 있었습니다.
‘끝’의 낭만은 모든 것을 아름답게 만들어주지만, 절대로 연구가 항상 아름답게만 진행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가장 엄밀한 방법으로 실험이 이루어지려면 통제해야 할 요인들이 잔뜩 있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실험에 쓰일 72개의 문단을 작성할 때는, 문단의 길이는 어느 정도로 맞춰야 할지, 행위주는 문단에 몇 번 등장해야 할지, 문단 내 문장의 순서는 어떻게 섞어야 할지, 실험 참가자가 가설을 파악하지 못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등 수많은 요인을 한 번에 고려하다 보니 내면의 까끌거림이 온몸으로 옮아가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이번 아너스 프로그램을 통해 그 까끌거림을 오히려 더 곤두세워야 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실험 결과에서 행위주의 유정성은 인과관계 파악에 도움이 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험이 거듭되면서 고유명사를 기억하려 노력했다는 실험 참여자의 보고가 있었기에 이를 실험 결과에 덧붙여 설명하였습니다. 제 논문을 심사해 주신 불어불문학과 최윤희 선생님께서는 발표회에서 이러한 설명이 정직하다는 점에서 좋다고 말씀해 주셨는데, 그때 연구자라면 언제나 자신의 연구를 비판적으로 보고 의심해야 한다는 생각이 순간 머릿속에 가득 들어찼습니다.
이러한 깨달음의 기회를 주신 인문대학 교육지원센터, 연구를 도와주신 실험 참가자분들, 연구를 읽고 논평해 주신 아너스 프로그램 교수님들과 학우님들, 무엇보다 지도교수님이신 정선우 선생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특히 이번 학기는 학부생으로서 마지막 학기였습니다. 무사히 5년 간의 공부를 마칠 수 있도록 도와주신 언어학과와 미학과의 선생님들, 친구들과 가족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제 예민을 알고도 늘 곁에 사랑으로 있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표면과 기저를 오가며 당연한 듯 보이는 것들을 의심하는, 까끌거리는 공부를 하겠다는 다짐으로 글을 마칩니다.

언어학과 진채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