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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논단] [퇴임소회] 조은수 철학과 명예교수

2023-10-30l 조회수 404





정년을 맞아 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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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오랜 시간 정년 후의 인생에 대해서 미리 생각할 시간을 가졌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시간이라는 손님이 문 앞에 와서 벨을 누를 때, 그래서 문을 열고 맞아 줄 때 실제로 어떤 감정과 생각을 느낄지는 참으로 미리 알기 어렵다.

 

다른 분들도 앞으로 다 거치실 것이니 나의 경험을 미리 말씀을 드린다. 짐작하시겠지만 정년을 앞두면 자신의 인생이 그동안 어떠했는지를 되돌아볼 기회가 상당히 많다. 뜬금없이 뭔가 센티멘털한 감정을 담아서 끊임없이 자신의 과거를 되돌아보는 그런 자발적인 것 말고, 외부에 의한 것 말이다. 퇴임식 직전까지 여러 번에 걸쳐서 짧은 즉석 스피치를 해야 했던 여러 아찔한 순간들 외에, 퇴직 몇 달 전부터 퇴직 후의 삶, 즉 연금, 건강 보험들에 대한 강의 시리즈와 그에 따른 각종 후속 행정 절차가 시작되면서,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직장보험에서 지역보험으로의 전환이라는 것은 막연히 느끼고 있던 미래의 삶의 모습에 대한 인식을 깨쳐주는 효과가 있었다. 그리고는, 퇴직 한두 달 전쯤에 대학을 통해 또 학과를 통해서 퇴직 교원 포상이나 명예교수 추천을 위한 업적조서 작성을 요청을 받았을 때, 교육자로서 또한 연구자로서 나는 무엇을 이루었는가를 적시해야 하는 그 무거운 일을 더 이상 미룰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또한 은퇴식을 하기 직전에 찾아온 풋풋한 미소의 대학신문 학생 기자들의 질문은 나의 사회적 존재의 가치에 대해 성찰하는 기회를 가져다 주었다.

 

이상의 이런저런 과정을 거치면서,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20년에서 1년 모지란 19년의 세월을 막상 되새겨보려니 너무 아득하고 막막하였다. 그래서 컴퓨터 하드디스크 속에 연도 별로 정리되어있는 파일들을 열어 보기도 하고, 연구실에 꽂혀 있는 책과 자료들도 들쳐 보기도 하면서 그 속에 남아 있을 지난 세월의 자취를 되살려 기억해 보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아마 과거에 대해 연상과 기억은 두뇌의 자연적 보호 기제에 의해 스스로를 위안하는 기억만 남는 모양이다.

 

지난 19년간 인문대 6동에 둥지를 틀고 학내외에서 여러 가지 일들을 많이 경험해 보았다. 그런데 학생 지도나 강의, 연구, 저술 등에 대한 기억보다는, 부임하자마자 맡게 된 세계철학자대회 일, 규장각 국제한국학센터 만든 일, 학회 후원금 얻기 위해 뛰어다니던 일, 그리고 무엇보다 작년에 홍수와 코로나 속에서 치른 세계불교학대회 등, “에 대한 기억이 더 생생하다. 가장 느긋하고 기분 좋은 느낌을 주는 기억은 인문대 학사협의회로 중국 항주에 갔을 때 서경호 선생님 일행과 같이 시골 찻집에 앉아서 중국차를 마시던 일이다.

이 글을 쓰기 전에 다른 선생님의 소감문을 한번 읽어 보았다. 고졸하고 성숙한 기미가 물씬 느껴지는 글이었다. 대학에 오랜 세월 봉직하면서 연륜이 쌓인 교수님의 담담한 모습이 연상되는 글이었다. 하지만 그런 글을 쓰기에는 아직 내 마음이 그리 차분하지 않은 것 같다. 사실 퇴직하고 바로 1년간 미국의 한 대학에 초빙교수로 오게 된 것은 큰 행운이라 생각된다. 아직 쓰다만 책이 두 권이나 있다. 오후에 만난 젊은 교수의 씩씩한 목소리를 들으면서 다시 컴퓨터 앞으로 돌아가서 작업을 계속하고 싶은 의욕이 생기고 있다. 내일은 이곳 대학의 도서관 사서를 만나 생각하고 있는 디지털 인문학 프로젝트에 대해서 자문을 받기로 했다.

 

사실 19년 동안 고민도 많았고 어려움도 많았지만, 굵게 남는 감정은 고마움, 즐거움, 보람 그런 것들이다. 과거의 일이 이렇게 기억된다는 데 나는 상당히 만족하고 있다. 내 스스로 꽤 좋은 시간을 보냈음을 알 수 있다. 그 즐거운 시간을 함께 해 준 여러 동료 교수들, 학과와 인문대의 여러 스탭들에게 다시 한번 진한 고마움을 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