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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아너스 프로그램 수기 - 노어노문학과 박윤미

2022-06-23l 조회수 1052

 연구제목 : 러시아어 색채어의 의미 분석 : 갈루보이(goluboj)와 씨니(sinij), 까리치녜브이(korichnevyj)와 부릐 (buryj)의 비교를 중심으로









노어노문학과 박윤미


입학할때부터, 그리고 얼마 전까지 제가 꼭 졸업논문을 쓰겠다고 다짐해 온 것은 러시아 문학과 어학 중 문학이었습니다. 같은 텍스트를 읽고도 다르게 해석하는 것이 늘 모종의 짜릿함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원체 고지식한 편인 저는 문학 수업을 들을 때 책에 대한 제 해석이 가장 ‘정답’에 가까울 거라는 생각을 종종 했습니다. 인문학과는 거리가 먼 마음가짐임을 알면서도 절대로 타인의 해석에 휘둘리지 않겠다고 다짐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수업이 끝날 때면 저와 다르지만 논리가 탄탄한 학우의 해석에 감탄하며 집으로 돌아가곤 했습니다. 늘 새로운 해석을 가져다주는 문학에 매료되었던 것도 이런 이유였습니다.

반면, 제게 어학은 머리를 쥐어 싸맨 채 외우는 것에 가까웠습니다. 원체 어학에서 사용하는 개념이 낯설기도 했고, 누구나 하는 말을 지나치게 어렵게 분석한다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러시아어 실력을 높이는 것도 힘든데 그런 러시아어를 다른 각도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사실에 싫증이 났던 것도 같습니다. 그렇게 어학과는 담을 쌓던 중,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는 심보였을까요. 도대체 왜 그렇게 많은 내용을 암기해야 했는지, 그게 도대체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 알고 싶어졌습니다. 어학 시간에 필기한 내용을 살펴보던 중 ‘러시아어에는 파란 계열의 기본색채어가 두 개다.’라는 문장이 눈에 밟혔습니다. 중요해서 별표 두 개를 치고 암기했던 명제를 제 나름의 논리로 증명할 수 있다면, 인문학도로서 의미있는 마무리가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러시아어 색채어의 의미 분석: 갈루보이(light blue)와 씨니(blue), 까리치녜브이(brown)와 부릐(brown)의 비교를 중심으로’라는 졸업 논문을 쓰게 되었습니다.

파란 계열의 기본색채어는 두 개라는 것으로 학자들의 의견이 대개 일치했던 것과 달리, 갈색의 경우 논쟁의 여지가 있었습니다. 두 계열의 기본색채어를 비교하는 것으로 주제를 구체화한 이유입니다. 여러 가지 방법론 중 의미론을 바탕으로 색채어의 연어 관계(형용사 + 명사 조합)를 분석하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단어가 어떤 의미로 어떻게 쓰이는지 살피지 않고서는 왜 특정 단어가 기본색채어인지 판단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단어의 사용 양상을 담은 러시아 국립 코퍼스의 자료를 분석하며 연구를 진행한 결과, 갈루보이(goluboj)와 씨니(sinij)는 의미 영역이 분화되어 기본색채어로 공존하게 되었지만, 까리치녜브이(korichnevyj)는 부릐(buryj)가 담당 하던 의미를 침범하여 궁극적으로 ‘부릐’를 대체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갈루보이’는 하늘색이라는 의미와 함께 은유를 통해 전이된 의미로도 많이 쓰이는 데 비해, ‘씨니’는 철저히 파란색을 지시하는 색채어로 쓰였습니다. 의미 영역이 구분되다 보니 둘 다 기본색채어로 평화롭게 공존하는 토대가 마련됐습니다. 반면, 갈색을 의미하는 ‘까리치녜브이’와 ‘부릐’는 각각 인공물과 자연물을 수식해, 1960년대 이전에는 두 색채어의 의미 영역이 구분됐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까리치녜브이’가 점차 자연물까지 수식하게 되면서 궁극적으로 ‘부릐’를 축출하고 단일한 기본색채어로 자리 잡게 됐습니다. 파란 계열의 기본색채어는 기능적 분화를 통해 공존했다면, 갈색 계열의 경우 의미의 중첩으로 인한 경쟁으로 기본색채어가 전이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전부 외국어로 된 자료라 해석하기부터 쉽지 않았지만, 무엇보다 어려웠던 것은 기존의 연구를 논문의 주장에 맞게 정리하는 작업이 었습니다. 제가 하고픈 이야기는 엉성한 논리일지라도 앞으로 죽죽밀고 나갈 수 있었던 반면, 제 논의가 어떠한 토대 위에 서 있는지 정리하는 것은 너무나 어려웠습니다. 자료를 볼 때마다 새로운 게 끝없이 등장했고 선행연구를 정리하면 할수록 밑천이 드러나는 듯했습니다. 대충 그럴듯한 말로 제 주장을 포장하고 싶을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학술적 글쓰기란 제 주장과 타인의 주장을 엄격하게 구분 하고, 엄선한 어휘들로 최대한 정확하게 주장하는 것임을 알고 있었기에 최대한 그 목적에 부합하려 노력했습니다. 졸업 논문을 포함해 아너스 프로그램 전 과정이 ‘아는 척하기’보다 모르는 것에 솔직해지고 공부해나가는 것에 가까웠던 이유입니다.

졸업을 한 달도 채 남기지 않은 시점에 인문학이 제게 어떤 의미냐고 묻는다면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참 좋은데, 표현을 못 하겠네”라는 한 개그맨의 유행어처럼, 인문학의 의미를 설명하자면 하고픈 말은 많은데 정리가 안 됩니다. 그러나 졸업하는 사람으로서 나름대로 대답해본다면, 제게 인문학은 이해하고 이해받는 학문이었습니다. 길 가다가 절대로 마주하고 싶지 않은 종류의 인간을 보더라도 그것이 문학이라면 주인공이 왜 이러한 생각과 행동을 하는지 고민해야 했습니다. 당연하게 여기던 말이라도 어학이라면 그것이 왜 내게 말이 되는지 고민해야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저는 평생 이해할 수 없을 거라 믿었던 사람들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었고 이해 받을 수 없을 거라 여겼던 저 자신에게도 조금은 너그러워졌습니다. 인문학은 밝은 학문도, 감성적인 학문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귀찮고 고통스러울지라도 질문하고 나름대로 답을 내리는 과정에서 인간을 이해하는 마음이 생긴다고 생각합니다. 제 협소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 데 도움 주신 인문대학, 교수님들, 그리고 학우들에게 이 자리를 빌려 감사하다는 말씀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