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논단] [퇴임소회] 김기현 철학과 교수
[퇴임소회] 김기현 철학과 교수
반 평생의 삶의 공간을 접으며,
어제는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린 음악대학 정기연주회에 다녀왔다. 바그너, 베토벤, 생상으로 이어지는 관현악 중심으로 프로그램이 구성되었고, 학사과정 3-4학년으로 이루어진 오케스트라가 연주하였다. 어느 기성 오케스트라에 못지 않은 훌륭한 공연을 보면서 서울대라는 기관의 교수라는 사실이 자랑스러웠다. 음대 교수들도 나만큼 감동했을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내가 가르쳤던 학생들의 경우도 마찬가지 아닐까? 인문대의, 철학과의 학생들이 자신의 전공 실력을 발휘할 때, 음대 교수들은 아마도그들의능력에놀랄것이다.나의평가는훨씬인색하다.교육자의입장에서면학생이이룬것을보기보다앞으로가야할 길에 마음을 두기 때문일 것이다.
훌륭한 인재들을 가르치고 지적으로 교류하는 시간도 이제 마지막을 향해 가고 있다. 음악회에 다녀온 후, 내가 지난 25년간 서울대에 있었던 시간을 되돌아보게 된다. 우수한 제자와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는 기회를 가진 것에 감사하고, 칭찬과 격려를 아꼈던 것이 후회스럽다.
미국에서, 그리고 국내 타대학에서 몇년씩을 보낸 후 서울대 교수로 25년을 보냈다. 학생으로 7년을 보낸 것을 더하면, 지금까지 정확히 반평생을 관악에서 보낸 셈이다. 인문대에서 교무부학장을, 집행부에서 교무처장을 하면서 서울대를 더 잘 알게 되는 기회도 가졌다. 보직 경험을 통해 인문학의 위상이 변해가는 과정을 외부적 관점에서 볼 수 있었는데, 그 과정이 즐겁지만은 않았다. 인문 교양교육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목소리가 들려오고, 연구비의 간접비를 인문사회계 교수들의 해외 파견 경비의 일부로 사용하는 것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들려 온다.
대한민국 공동체를 돌아 보면, 온갖 종류의 갈등이 도처에서 생채기를 내면서 지속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팽배해 있다. 환경 문제가 시대의 화두가 되어 있다. 이들 문제의 중심에는 인간과 인간,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인문적 성찰이 놓여있는데, 기업체와 정부의 관련 위원회는 경영학, 법학, 자연과학자들로 채워져 있다. 정부에서 새로이 지속가능발전 국가위원회를 만든다고 하기에 인문학자가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는 의견을 전달하였는데, 앞으로 어떻게 구성될 것인지 지켜볼 일이다.
교내외에서 인문학에 대한 비우호적인 분위기가 확산되면서 신음이 깊어지는 시점에 학교를 떠나자니 마음이 가볍지 않다. 인문학이 제 가치를 발현하기 위하여 무엇을 해야할까? 교내에서의 위상 강화를 위해서는 교육 분야가 강화될 필요가 있다. 특히 교양교육에서의 인문학의 효능을 높여야 한다. 인문학적 훈련을 통하여 학생들이 시대를 이해하고, 자신이 추구하는 삶의 의미를 되돌아 볼 수 있도록 도움을 줄 때 인문학을 향한 시선은 달라질 것이다. 또한 논증적이고 비판적인 사고력을 키워줌으로써 단지 정보를 수용하는 차원을 넘어 창의적 사고를 위한 토대를 제공할 때, 인문학의 가치는 빛나고 기존의 비판적인 잡음은 가라앉을 것이다. 인문학이 타 학문분야에 제공하는 교육은 단지 “교양”이 아니라, 각 학문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기 위한 핵심역량이다.
대외적으로는 앞에서 언급한 갈등, 환경 등의 사회적 문제에 대한 인문학의 참여를 확대하기 위하여 더욱 노력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인공지능, ESG 등과 관련된 다양한 사회적 윤리적 문제에 대한 논의를 보면, 행정, 공학, 법, 경영을 전공하는 이들이 대부분이고, 인문학의 존재감은 느껴지지 않는다. 실천적이고 현실적인 문제에 대한 인문 교육이 이루어지고, 이런 교육이 우리 공동체의 사회적 문제에 대한 목소리로 이어질 때, 점차 쇠약해지는 인문학의 위상이 회복의 길로 들어설 것이다.
이런저런 회고를 하다 보니, 결국은 유체이탈의 잔소리가 된 것 같다. 인문학을 사랑하는 부족한 한 사람이 후배 교수들에게 기대하며 던지는 고언으로 해량해주기 바란다. 서울대학교, 특히 인문대학이 있었기에 지난 25년간 과분한 대우를 받아 왔다. 인문학이 더욱 발전하고 존중을 받아, 내가 누린 행운보다 더 큰 행운이 후배 교수들, 후학들에게 깃들기를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