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연구동정] 2023년도 AFP인문학펠로우 황향주
연구동정
역사학 분야의 다양한 화두 가운데 가장 저의 관심을 끈 것은 ‘권력’이었습니다. 권력의 본질을 탐구하고, 권력의 계승 및 재생산을 가능하게 한 기제를 구명하고 싶었습니다. 국가·민족과 같은 거대담론 속의 권력, 가족·젠더 등 미시적 영역에서 작동하는 권력 모두 관심 영역에 존재하였기에, 거시사와 미시사를 아우르는 연구를 해보겠다는 과분한 포부를 안은 채 연구자의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전근대 왕조사회에서 최고권을 독점한 최상위 정치집단임과 동시에 국왕의 ‘공인된’ 가족이었던 왕실로 관심을 두게 된 것은 필연적 결과였을 것입니다.
저는 박사학위논문에서 고려 전·중기 왕실의 구조와 편제를 다루었습니다. 부계친족의 논법에 따라 인위적으로 사회를 재조 직하였던 조선의 등장 이전 한국은 총계적 사회구조의 양상을 보였습니다. 이처럼 부계·모계 혹은 이중출계의 분화출계와 달리 혈연에 따른 귀속 원리가 명확하게 분화되지 않았던 미분화출계, 즉 총계의 논법 속에서 국왕권의 원천 집단이었던 왕실은 어떠한 방식으로 그 외연을 획정하고 생물학적·정치적 영속성을 확보하였는지 밝히는 것이 제 연구 목표였습니다.
시기적으로 고려 전·중기에 천착하였던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였습니다. 첫째, 이 시기에는 동아시아에서 전범의 위상을 갖는 당제(唐制)가 출현하여 한반도 국가체제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토속적 요소가 상당히 잔존하였던 신라와 달리 고려는 3 성 6부를 비롯한 당제·송제(宋制)를 적극 수용하여 사회문화적 토대에 맞추어 변용하였습니다. 왕실 제도 개편 또한 그 연장선 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문제는 당제의 근간이 되었던 중국의 역사적 경험, 사상적 근거가 부계적 종법질서의 토대 위에서 구성 되어 왔다는 것입니다. 반면 고려 왕실은 총계적 사회구조를 반영한 신라 왕실의 근친혼 문화와 친족조직을 상당히 답습하고 있었습니다. 고려는 왕실의 사회문화적 토대를 부정하고 인위적으로 재조직하기보다 당제의 재해석과 변용을 통하여 이 간극을 해결하고자 하였고, 그 결과 당제의 용어를 차용하였으되 본질적으로 구분되는 고려식 왕실봉작제가 완성되었습니다.
둘째, 고려는 고대의 폐쇄적 신분구조를 부정하고 관료제의 원리가 구현될 수 있는 새로운 세상을 지향함과 동시에 왕실의 배타적 위상과 권리를 확보해야만 하는 모순된 과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저는 조선후기까지 회자되었던 고려 왕실의 독특한 근친혼 관습을 이러한 관점에서 분석하고자 하였고, 고려 왕실이 성립시켰던 ‘혼인규범’의 실체를 밝히고자 하였습니다. 저는 고려 왕실의 혼인규범이 왕실 여성들의 외혼에 대한 강력한 통제에 초점을 맞추었다는 것을 주장함과 동시에 이러한 혼인규범이 중세라는 시대적 특성에 어떻게 부합하였는지 분석하였습니다.
2023년도 인문학 펠로우로서 후속 연구를 시작하며 저는 크게 두 가지 세부 연구과제를 설정하였습니다. 첫째, 박사학위논 문에서 부차적으로 다루었던 왕실 여성의 편제를 통시적으로 살펴보고자 하였습니다. 1차년도에 공간한 「고려 전·중기 왕실 여성의 편제와 그 특성:‘주(主)’계열 칭호의 존재 배경과 활용 방식을 중심으로」는 이러한 기획의 첫 번째 결과물입니다. 앞서 고려 왕실의 혼인규범은 왕실 여성의 외혼 통제에 초점을 맞추었음을 주장하였습니다. 따라서 중국의 봉작제를 도입할 때 가장 현실과 조율하기 어려웠던 것이 바로 왕실 여성에 대한 편제였습니다. 본고에서는 왕실 남성의 경우 중국 유래의 봉작제를 적절한 방식으로 변용하는 선에서 편제가 마무리될 수 있었던 반면 여성들에 대해서는 토속적이고 특징적인 대안이 마련될 수밖에 없었음을 논증하였습니다. 중국 지배층 여성에 대한 편제로 활용되었던 내・외명부 직제는 고려에서 보완적 수단에 불과하 였으며, 다른 나라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궁주·원주·전주 등 궁원명과 결합된 ‘주’계열 칭호가 왕실 여성에 대한 기본 편제로 활용되었다고 이해하였습니다.
두 번째 세부 연구과제는 고려 전·중기 이후의 왕실 역사를 세계사적 관점에서 다시 서술하는 것이었습니다. 몽골과의 조우 이후 고려사회는 본질적으로 다른 국면을 맞이하게 됩니다. 가장 중요한 변화는 왕실 여성의 외혼 금지 규범이 강제적으로 파괴된 것이었습니다. 많은 왕실 여성들이 국내외 유력자들과 혼인하기 시작하였고, 왕실에서는 명확한 내외 구분이 발생하였습 니다. 왕실의 혈족이자 혼인파트너로서 존재하였던 여성들은 혼인파트너의 위상을 상실하였고, 따라서 궁원명 기반의 ‘주’계열 칭호는 존재 의미가 반감되었습니다. 왕실 남성 역시 큰 변화에 직면하였습니다. 왕녀·종녀와의 근친혼으로 역대 국왕의 사위 자격을 얻어 봉작되고 왕실 구성원으로서의 지위와 특권을 이어갔던 왕실 남성들은 이제 기존 시스템에 의거하여 왕실을 영속 시킬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 변화에 대한 대응으로서 고려후기부터 조선전기까지의 왕실이 어떠한 시행착오를 거쳤는지, 몽골이 이입한 새로운 사회구조에 대하여 왕실만큼 신속하게 대응할 필요는 없었던 관료층 이하 계층과 왕실 간의 문화적 차이가 어떠한 역사적 국면들을 만들어내었는지 구명하는 것이 향후의 중요한 과제입니다.
한국 중세 왕실의 구조와 재생산 원리
2023년도 AFP인문학펠로우 황향주
역사학 분야의 다양한 화두 가운데 가장 저의 관심을 끈 것은 ‘권력’이었습니다. 권력의 본질을 탐구하고, 권력의 계승 및 재생산을 가능하게 한 기제를 구명하고 싶었습니다. 국가·민족과 같은 거대담론 속의 권력, 가족·젠더 등 미시적 영역에서 작동하는 권력 모두 관심 영역에 존재하였기에, 거시사와 미시사를 아우르는 연구를 해보겠다는 과분한 포부를 안은 채 연구자의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전근대 왕조사회에서 최고권을 독점한 최상위 정치집단임과 동시에 국왕의 ‘공인된’ 가족이었던 왕실로 관심을 두게 된 것은 필연적 결과였을 것입니다.
저는 박사학위논문에서 고려 전·중기 왕실의 구조와 편제를 다루었습니다. 부계친족의 논법에 따라 인위적으로 사회를 재조 직하였던 조선의 등장 이전 한국은 총계적 사회구조의 양상을 보였습니다. 이처럼 부계·모계 혹은 이중출계의 분화출계와 달리 혈연에 따른 귀속 원리가 명확하게 분화되지 않았던 미분화출계, 즉 총계의 논법 속에서 국왕권의 원천 집단이었던 왕실은 어떠한 방식으로 그 외연을 획정하고 생물학적·정치적 영속성을 확보하였는지 밝히는 것이 제 연구 목표였습니다.
시기적으로 고려 전·중기에 천착하였던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였습니다. 첫째, 이 시기에는 동아시아에서 전범의 위상을 갖는 당제(唐制)가 출현하여 한반도 국가체제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토속적 요소가 상당히 잔존하였던 신라와 달리 고려는 3 성 6부를 비롯한 당제·송제(宋制)를 적극 수용하여 사회문화적 토대에 맞추어 변용하였습니다. 왕실 제도 개편 또한 그 연장선 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문제는 당제의 근간이 되었던 중국의 역사적 경험, 사상적 근거가 부계적 종법질서의 토대 위에서 구성 되어 왔다는 것입니다. 반면 고려 왕실은 총계적 사회구조를 반영한 신라 왕실의 근친혼 문화와 친족조직을 상당히 답습하고 있었습니다. 고려는 왕실의 사회문화적 토대를 부정하고 인위적으로 재조직하기보다 당제의 재해석과 변용을 통하여 이 간극을 해결하고자 하였고, 그 결과 당제의 용어를 차용하였으되 본질적으로 구분되는 고려식 왕실봉작제가 완성되었습니다.
둘째, 고려는 고대의 폐쇄적 신분구조를 부정하고 관료제의 원리가 구현될 수 있는 새로운 세상을 지향함과 동시에 왕실의 배타적 위상과 권리를 확보해야만 하는 모순된 과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저는 조선후기까지 회자되었던 고려 왕실의 독특한 근친혼 관습을 이러한 관점에서 분석하고자 하였고, 고려 왕실이 성립시켰던 ‘혼인규범’의 실체를 밝히고자 하였습니다. 저는 고려 왕실의 혼인규범이 왕실 여성들의 외혼에 대한 강력한 통제에 초점을 맞추었다는 것을 주장함과 동시에 이러한 혼인규범이 중세라는 시대적 특성에 어떻게 부합하였는지 분석하였습니다.
2023년도 인문학 펠로우로서 후속 연구를 시작하며 저는 크게 두 가지 세부 연구과제를 설정하였습니다. 첫째, 박사학위논 문에서 부차적으로 다루었던 왕실 여성의 편제를 통시적으로 살펴보고자 하였습니다. 1차년도에 공간한 「고려 전·중기 왕실 여성의 편제와 그 특성:‘주(主)’계열 칭호의 존재 배경과 활용 방식을 중심으로」는 이러한 기획의 첫 번째 결과물입니다. 앞서 고려 왕실의 혼인규범은 왕실 여성의 외혼 통제에 초점을 맞추었음을 주장하였습니다. 따라서 중국의 봉작제를 도입할 때 가장 현실과 조율하기 어려웠던 것이 바로 왕실 여성에 대한 편제였습니다. 본고에서는 왕실 남성의 경우 중국 유래의 봉작제를 적절한 방식으로 변용하는 선에서 편제가 마무리될 수 있었던 반면 여성들에 대해서는 토속적이고 특징적인 대안이 마련될 수밖에 없었음을 논증하였습니다. 중국 지배층 여성에 대한 편제로 활용되었던 내・외명부 직제는 고려에서 보완적 수단에 불과하 였으며, 다른 나라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궁주·원주·전주 등 궁원명과 결합된 ‘주’계열 칭호가 왕실 여성에 대한 기본 편제로 활용되었다고 이해하였습니다.
두 번째 세부 연구과제는 고려 전·중기 이후의 왕실 역사를 세계사적 관점에서 다시 서술하는 것이었습니다. 몽골과의 조우 이후 고려사회는 본질적으로 다른 국면을 맞이하게 됩니다. 가장 중요한 변화는 왕실 여성의 외혼 금지 규범이 강제적으로 파괴된 것이었습니다. 많은 왕실 여성들이 국내외 유력자들과 혼인하기 시작하였고, 왕실에서는 명확한 내외 구분이 발생하였습 니다. 왕실의 혈족이자 혼인파트너로서 존재하였던 여성들은 혼인파트너의 위상을 상실하였고, 따라서 궁원명 기반의 ‘주’계열 칭호는 존재 의미가 반감되었습니다. 왕실 남성 역시 큰 변화에 직면하였습니다. 왕녀·종녀와의 근친혼으로 역대 국왕의 사위 자격을 얻어 봉작되고 왕실 구성원으로서의 지위와 특권을 이어갔던 왕실 남성들은 이제 기존 시스템에 의거하여 왕실을 영속 시킬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 변화에 대한 대응으로서 고려후기부터 조선전기까지의 왕실이 어떠한 시행착오를 거쳤는지, 몽골이 이입한 새로운 사회구조에 대하여 왕실만큼 신속하게 대응할 필요는 없었던 관료층 이하 계층과 왕실 간의 문화적 차이가 어떠한 역사적 국면들을 만들어내었는지 구명하는 것이 향후의 중요한 과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