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논단] [부임소회] 천 진 중어중문학과 교수
신임교수 부임소회
안녕하십니까. 2023년 2학기 인문대학 중어중문학과에 부임한 천진입니다. 영어영문학과 오예슬 선생님, 노어노문학과의 백승무 선생님, 한국사학전공 박성현 선생님, 서양사학전공 이지은 선생님과 함께 임명장을 받았습니다. 설렘과 낯섦이 뒤섞여 방황하는 신임들을 따뜻하게 환대하고 품어 주시는 인문대학 선생님들 덕분에 평온한 생활의 리듬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작은 리듬이지만 잘 살려 인문대의 조화로운 리듬으로 증폭될 수 있도록 하루하루 되돌아보고 조금씩 나아가고자 다짐도 해 봅니다.
연구실 창문으로 바람이 한 줄기 불어오면 홀린 듯 나가 산책을 해봅니다. 인문대 1동 앞 회화나무를 지나, 줄지어 있는 나무들 사이를 산책하다가 보면 바람이 불 때마다 도서관 앞 종축에 서 있는 계수나무에서 달콤한 솜사탕 향기도 납니다. 인문대와 도서관 사이의 느티나무들은 연륜이 상당해 보입니다. 아름드리 자란 느티나무 그늘은 마을 공동체의 사랑방 공간을 만들고 그래서 광장을 만들기도 한다고 하던데, 지식의 마을 공동체가 모여 도시를 이룬 이 장소에서 사랑방은 어딜까 광장이 어딜까 궁금하기도 합니다. “미래를 개척하는” “지식 공동체” 같은 글자들도 교정 곳곳에서 자꾸 보이기도 합니다. 산책 중 살짝 덥고 답답해질 때, 바람이 불어와 차분해지면 잠시 생각도 합니다. 이 지식 마을 공동체에서는 ‘앎’이 어떻게 움직이는 것일까, 어떻게 구성되고 어떠해야 하는 것일까.
공부의 초입 때도 그리고 여전히 지금도, ‘앎’에 대한 호기심과 질문 때문에 고민이기도 합니다. 연세대학교 중어중문학과에서 학사와 석사를 거쳐 2009년 박사학위를 받았을 때, 이때의 주제도 20세기 동아시아의 변동 속에서 ‘앎’이 어떻게 재구성되고 움직이는가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루쉰·량치차오·장타이옌과 같은 20세기 초 중국 근대의 유학생· 망명 지식인들의 근대적 학문과 글쓰기 문제를 통해 그리고 개념어와 지식의 번역과 전유 과정을 통해 동아시아 근대의 지식과 글쓰기의 변동을 살펴보면서, 20세기라는 시공간은 동아시아를 비롯한 지역의 역사들이 상호 얽혀 있기에 일국사라는 경계 안에 연구자가 편안히 대상을 마주하기가 어렵다는 고민도 생겼습니다. 이 고민은 일본의 동양학, 식민지 조선의 중국 문학, 냉전 체제 아래 동아시아의 중국 문학 연구 등, 중국 문학이라는 근대 제도의 형성을 되짚어 보는 작업에서도 역시 되풀이되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20세기의 ‘앎’의 문제를 다루며 가장 곤혹스러운 점은 앎은 제도만이 아니라 문화운동 같은 현장·사건 속에 움직이고 있을 때 더 다루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루쉰의 동생인 저우줘런의 표현처럼 “종이 위에 글자들을 운동하게 하는” 문화의 힘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요, 100여 년 전, ‘세계의 속성을 안 이상 같은 상황은 반복하지 않겠다’는 깨달음, 이러한 앎을 통해 독립적이고 책임 있는 삶을 꾸리고자 하는 자존감을 지닌 개체들은 강력한 앎을 요청하고 삶을 갱신하며 사회를 꾸리고자 합니다. 20세기 초 앎은 근대의 제도들을 완성하려 하면서도 항상 제도의 경계를 넘나들며 외부로 열리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청년으로 그리고 사회의 어른으로, 20세기 격동의 시공간을 견뎌냈고 혹은 견디려 했던 사람들의 마음, 환희와 환멸이 교차하는 순간을 거듭하면서도 평정심을 잃지 않고 끊임없이 질문하며 몸부림쳤던 동아시아의 마음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고민 중입니다.
가벼운 산책을 마치고 돌아온 연구실은 문을 닫고 앉아 있으면 고요합니다. 생계의 짐을 덜어주고 글쓰기의 안정을 마련해 주는 참으로 감사한 공간입니다. 고요함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적막함이 되지 않을까 서늘해지는 느낌이 들 때면, 학회 사람들이 공동으로 전집을 번역하고 만들었던 루쉰이 생각납니다. 학자가 되거나 아니면 작가가 되거나 결국에는 모두 매문(賣文)하며 먹고 살아야 함을 받아들이면서도, 루쉰은 대학교 연구실의 이 안정감에 빠져버리지 않으려 했던 것 같습니다. 오히려 “오늘도 중국이라는 이 거대한 묘지를 산책한다”며 의식적으로 안정을 거부합니다. 루쉰은 저에게는 길을 잃었다는 느낌이 될 때 밤이 되어야 겨우 볼 수 있는 밤하늘 북극성 같습니다. 소리도 없고 바람도 전혀 통하지 않는 진공상태 같은 적막감이 될까 서늘한 느낌이 들 때, 창문을 열고 하늘을 봅니다. 청년이 사회의 제대로 된 어른이 될 수 있도록, 최대한 넓게 그리고 깊이 있게 앎과 삶을 고민해 볼 수 있게, 함께 천천히 걸어 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작은 소망도 품어 봅니다. 이곳 지식의 마을 공동체가 안으로 닫히지 않고 열려, 느티나무 아래 바람도 시원하게 통하고 활기찬 소리들이 문밖으로 넘어갈 수 있기를 말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