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논단] [연구동정] 손장순 문학연구기금 인문학 펠로우 정서현
연구제목: 해리엇 마티노의 장르 초월적 글쓰기에 드러난 픽션의 정치경제학
손장순 문학연구기금 인문학 펠로우 정서현
1832년에서 1834년까지 연재된 해리엇 마티노의 『정치경제의 실례』는 사실주의 소설을 통해 영국 대중들에게 새로운 정치경제의 기본 원칙들을 교육하고자 했던 작품으로, 출간 당시에는 영국 19세기를 대표하는 작가인 찰스 디킨즈의 소설보다 더 많은 판매 부수를 기록했습니다. 하지만 마티노의 작품은 그 이후 학계에서도, 대중 독자들로부터도 특별한 주목을 받지 못해 왔습니다. 20세기 후반 페미니즘 비평의 대두와 함께 영국 최초의 여성 사회학자이자 경제학자로서 마티노의 위상은 새롭게 정립되었으나 마티노의 소설가로서의 면모는 여전히 더욱 정교한 연구를 요합니다. 저의 연구는 마티노의 소설뿐 아니라 그의 여행기, 사회학적 연구방법론, 정치경제학 해설서 등 다양한 저작에서 픽션이라는 문학적 장치가 중요하게 활용된다는 점에 착안하여 19세기 영국의 여성 지식인에게 소설이라는 장르 그리고 픽션이 제공하는 가능성과 한계를 분석합니다. 특히 당대 가정 소설의 전통이 정치학, 사회학, 경제학, 인류학 등 현재 독립된 학문 분과로 존재하는 연구 영역들의 초기 발달 과정과 어떻게 상호작용했는가에 주목하는 이 연구는 여성 작가의 소설쓰기가 갖는 사회문화적 의미, 여성 저술가의 정치경제학 저작이 수용되어온 방식, 그리고 여러 장르를 거침없이 교차시켜 사용해 급속도로 변화하는 경제 체제에 관한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자 했던 마티노의 야심을 아울러 살펴봄으로써 산업사회 초기 지식 생산 구조의 젠더지형과 그 상황을 타개해가는 한 여성 작가의 모습을 복합적으로 분석합니다.
문학과 비문학의 경계를 적극적으로 횡단하는 지식인 마티노에 대한 관심은 저의 박사 논문 『불가능한 모성: 영국 제국의 속임수와 가정소설』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논문에서는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 극적으로 부상하는 영국의 모성 담론과 영국 제국 팽창의 상호 의존성을 밝히고 그 역사적 흐름에서 “나쁜 엄마”로 등장하는 소설 속 인물들의 독특한 역할을 살펴보았습니다. 논문을 통해 강조하고자 한 것은 특정 작가나 이야기의 성취로서가 아니라 집단적이고 가변적인 상상력이자 정치적이고 이론적인 힘을 가진 가능태로서의 모성이었는데, 이 때 구체적인 물적 기반에 토대를 둔 경제 논리가 소설에서 사회문화적 관습과 윤리적 의무의 형태로 드러난다는 점에 특히 주목했습니다. 특정 시기의 문학작품에 반복해 등장하는 인물 혹은 설정과 그 정치경제적 맥락의 관계를 탐구하던 중, 우화처럼 읽히는 사실주의 가정소설을 초기 경제학 원칙들에 관한 직설적이고 교훈적인 서술과 투박하게 병치한 『정치경제의 실례』의 절묘한 구조는 소설 장르의 사회적 기능을 본격적으로 질문해 볼 기회로 다가왔습니다. 일견 조화롭지 않게 느껴지는 이 병치구조를 (소설로부터 자연스럽게 도출되는 것이 아니라) 어색하게 강요된 경제적 훈계라거나 단순한 예술적 실패라 보는 것은 동시대 지식인들의 정치경제 구조에 관한 관심과 문학사의 교차점을 간과하는 해석임에 착안한 저의 연구는 마티노 작품의 약점이라 여겨져 온 특징, 즉 장르의 교차와 혼합이 가져오는 혼란과 모순을 전방위적 사회 연구자로서의 입지를 확보하기 위한 여성 저술가의 전략적 선택으로 읽습니다. 특히 픽션의 가능성에 대한 마티노의 깊은 이해가 그와 같은 전략의 기반을 이룬다고 해석하고 마티노의 소설을 문학과 무관한 것처럼 보이는 분야의 저작들과 나란히 살펴보며 그 사이에 공유되는 픽션의 문화적 힘에 주목하면 당대의 소설가와 소설의 입지에 관한 풍부한 역사적 통찰을 얻을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이렇듯 저의 문학 연구를 관통하는 핵심적 관심사는 특정 양식의 글쓰기가 발생한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맥락입니다. 또 크게 보아 이 연구는 19세기 영국의 정치철학을 포함하는 지성사뿐 아니라 이후 지속적으로 전 지구적 상식으로 작동해 온 자본주의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방식의 기반을 마련하는 데 영국 소설의 전통이 어떻게 개입하고 저항하며 또 협력했는가를 밝혀내는 기획입니다. 마티노의 작품을 통해 영국 소설의 발달 과정 및 여타 학문 분과들과의 교차를 연구하는 일이 현실과 동떨어져 있거나 먼 나라의 예술작품이 보여주는 미학적 성취를 논하는 일에 그치지 않고 현재의 문학 읽기, 교육, 그리고 객관 혹은 자연의 이름으로 통용되는 원칙 및 기이하게 굳어져버린 구조들의 근본 논리를 이해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면 더없이 기쁠 것입니다.
* 제52호 인문대 소식지 '연구동정'에 게재될 글을 위와 같이 싣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