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논단] [연구동정] 본질과 이것임 - 한성일 교수
본질과 이것임
인문대학 철학과 교수 한성일
영미권을 중심으로 한 분석적 전통의 철학에서 20세기 초반은 (약간의 과장이 허용된다면) ‘반-형이상학 시기’라 불러도 무리가 없다. 20세기 초에 팽배했던 이러한 반-형이상학적 기류를 이끌었던 원인들은 여럿이 있겠지만 특히 주요한 두 가지가 있다. 먼저 근대 과학의 성공을 배경으로 17세기부터 오늘날까지 주요한 패러다임을 형성하고 있는 기계론적 자연관은 전통 형이상학의 지위를 축소시켜왔다. 자연계의 운동 혹은 활동을 다양한 종류의 대상들이 지닌 다양한 종류의 본성을 통해 설명하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자연관에선 대상의 본성을 탐구하는 형이상학이 주요한 지위를 차지하지만, 미시-물리적 존재자의 법칙적 운동을 통해 모든 자연계 운동을 환원적으로 설명하려는 기계론적 자연관에선 형이상학이 수행할 역할이 딱히 없는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반-형이상학적 지적 풍토를 형성한 또 다른 주요 동기는 (20세기에 들어서 널리 수용된) 학적 논의라면 겸비할 것으로 기대되는 방법론적 규준을 형이상학적 논의가 만족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대상의 본성에 대한 탐구를 수행하는 형이상학적 논의는 대상이 실제로 어떠하다는 경험적 사실 주장이 아니라 대상이 필연적으로 혹은 가능적으로 어떠하다는 양상적 주장을 통해 진행된다. 20세기 초에는 ‘필연적’ 또는 ‘가능적’과 같은 양상 용어의 의미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필연성 주장들 및 가능성 주장들을 통해 진행하는 추론 가운데 어떤 것이 올바른 것인지를 결정할 의미론적 틀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이는 형이상학에서 등장하는 필연성 주장들은 그것의 의미를 특정할 수 없는, 실질적 내용이 없는 주장들이고 그래서 형이상학은 학적 지위를 얻지 못한다는 생각의 기반이 되었다.
20세기 중반에 이르러 이러한 지적 풍토는 양상논리학 및 가능세계 의미론의 눈부신 발전에 힘입어 주요한 전환점을 맞는다. 이는 물론 집단 지성의 노력의 결과이지만, 특히 1946년 예일대학교 박사학위논문에서부터 시작한 루스 마커스(Ruth Marcus)의 양화양상논리학 연구와 솔 크립키(Saul Kripke)의 1959년 양상논리학의 완전성 증명, 1963년 양상의미론 연구는 형이상학적 논의를 위한 형식적 기틀을 마련한 두 계기였다. 더욱이 1970년 프린스턴 대학 강연의 녹취록을 바탕으로 1980년에 출간된 『명명과 필연』 (Naming and Necessity, Harvard University Press, 1980)에서, 크립키는 형이상학적 필연성 개념을 혼동하기 쉬운 유사 개념들과 구분하고 철학의 여러 분야에서 형이상학적 필연성 주장들의 범례를 제시하는 등 형이상학에 대한 전방위적 옹호를 제공했다. 이는 분석적 전통의 철학에서 형이상학의 귀환을 알리는 기념비적 사건이었다.
이러한 논리학 및 의미론적 연구의 결실로 우리는 이제 형이상학에 등장하는 필연성 주장이 무엇을 뜻하는지 안다. 하지만 이러한 형식적 연구는 그 자체로 아직 필연성 주장의 근거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말해 주는 바가 없다. 필연성은 무엇 때문에 성립하는가? 키트 파인(Kit Fine)은 1994년 논문 ‘본질과 양상성(Essence and Modality)’에서 이에 대한 유망한 답변을 제시한 바 있다. 그는 필연적 참과 본질적 참은 구분됨을 보이고, 본질에 대한 정의(definition) 모형을 바탕으로, 필연적 참의 근거는 본질적 참에 있다고 제안한다. 당신은 신체적 특징, 정치적 성향, 선호하는 음악, 다른 대상과의 관계 등 다양한 속성을 가지고 있다. 당신의 이러한 속성들 가운데 어떤 속성은 특별한 지위를 가진다. 당신은 무엇인가? 당신은 사람이다. 당신은 먼저 하나의 대상이고, 그에 더해 사람이기도 한 것이 아니다. 당신은 사람이고 바로 그 사실 때문에 하나의 대상인 것이다. 사람임은 당신이 무엇인지 설명하는 속성, 즉 ‘정의적’ 속성이다. 파인에 의하면, 대상의 본질적 속성은 그것의 정의적 속성들 그리고 그 정의적 속성들이 (넓은 의미에서) 논리적으로 함축하는 속성들에 해당한다. 당신이 컨트리 음악을 좋아하는 것은 우연적이지만 당신이 사람이라는 사실은 필연적이다. 그리고 이 필연적 참은 사람임이 당신에게 본질적이란 사실에 근거한다.
파인의 견해는 현재 형이상학의 주요한 견해로서 많은 지지자를 가지고 있다. 나 역시 필연성의 근거를 본질성에서 찾으려는 파인의 입장에 동의한다. 하지만, 나는 본질에 대한 정의 모형에는 우려를 가지고 있다. 정의 모형에 의하면, 대상의 본질적 속성은 해당 대상이 무엇인지 설명하는 속성이거나 그런 속성에 의해 함축되는 속성, 즉 대상에 대한 설명적 역할을 하는 속성이다. 이는 대상에 대한 설명적 역할을 하지 않지만 그 대상에 본질적인 속성이 있을 가능성을 배제한다. 필자가 보기에, 이 지점이 정의 모형의 맹점(blindspot)이다. 당신은 필연적으로 당신과 동일하다. 이 필연적 참이 근거를 가지려면, 당신과 동일함이란 속성 혹은 당신의 동일성 속성이 당신의 본질적 속성이어야 한다. 그런데 당신의 동일성 속성은 바로 당신을 통해 이해되는 속성이어서 당신에 대한 설명적 역할을 하지 못한다. 필연성을 본질성에 근거지우려는 기획을 완수하려면, 본질적 속성을 대상에 대한 설명적 역할을 하는 속성에 국한하는 정의 모형을 거부하고 본질에 대한 새로운 모형을 모색해야 한다. 이를 논증하고 새로운 본질 모형을 제안하는 것이 필자의 최근 논문 '본질과 이것임(Essence and Thisness)'에서 수행하고자 한 바이다.
정의 모형의 이런 문제는 (얼핏 보면 쉽게 파악될 수 있을 듯이 보임에도) 관련 문헌에서 그 동안 주목하지 못했다. 이는 필연성/본질성 진술의 논리 형식에 대한 두 입장인 문장(sentential) 접근과 술어(predicational) 접근 가운데 학자들이 문제의식 없이 문장 접근을 채택하여, 민감하게 구분해야 할 관련 필연/본질 진술을 (λ-calculus 규칙을 통해) 같은 것으로 간주하고 있는 데서 비롯한다. 정의 모형이 안고 있는 문제의 심각성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선 필연성/본질성 진술의 올바른 논리 형식이 술어적 형태임을 알아야 한다. 논문에서 필자는 동일성의 필연성에 대한 크립키의 증명을 재검토하여 문장 접근의 중요한 결함을 드러냄으로써 술어 접근이 올바른 접근임을 우선 논증하고, 당신의 동일성 속성은 당신의 본질적 속성이지만 당신에 대해 설명적 역할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관련 개념들(귀결 본질, 속성 본질, 명제 함축과 구분되는 속성 함축, 집단collective 본질 등)에 대한 명료화를 바탕으로 논증하고자 했다.
정의 모형에 대한 필자의 반대가 옳다면, 대상에 대한 설명적 역할을 하지 않지만 그 대상의 본질적 속성인 그런 본질적 속성이 있다. 내가 당신을 처음 마주할 때, 나는 ‘이 사람은 누구지?’라고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당신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지만, 최소한 몇 가지 사실은 안다. 내가 ‘이 사람’이란 어구를 사용한 것에서 나타나듯, 나는 당신에게 사람임이란 속성을 귀속시키고 있다. 실제로 당신이 사람이면 나는 당신이 사람임을 안다. 그렇다고 내가 당신에게 사람임이란 속성만을 귀속시키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그가 누구건 한 사람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당신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이 사람’이란 어구를 사용할 때 나는 당신에게 사람임이란 속성 이외에 다른 속성을 함께 귀속시키고 있다. 그럼 그 다른 속성은 무엇인가? 내가 당신을 처음 마주할 때 ‘이 사람’이란 어구에서 ‘이’라는 지시사를 사용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해당 속성은 우리 언어의 일상 술어로 표현될 수 없다. 그것은 (당신이 특정 사람으로서 행하는 바를 목도하며) 오직 당신에 대한 직접 지시 행위를 통해서만 포착할 수 있는 그런 속성, 중세 철학자들의 용어를 빌리자면, 당신의 이것임(haecceitas; thisness)이다. 사람임은 당신이 무엇인지 설명하는 정의적 속성이다. 이는 분명 당신 본질의 핵심을 이룬다. 그러나 그게 전부가 아니다. 일상 술어를 통해 표현될 수 없는 당신의 이것임 혹은 당신의 원초적 개체성은 당신이 무엇인지 설명하지 않지만, 그 역시 당신 본질의 핵심이다. 이것이 필자가 논문을 통해 궁극적으로 이끌어 내려는 교훈이다.
이것임의 본질성을 이해하는 것은 철학의 여러 논의에 유의미한 함축을 가질 것으로 기대한다. 필자가 논문에서 고려한 함축들 이외에도, 이것임의 본질성은 우리 정체성에 대한 이해와 관련해 한 가지 함축을 가진다. 나의 두 아이가 죽음의 문턱에 있다. 한 아이라도 살리려면 두 아이 모두 죽기 전에 한 아이를 희생해야 한다. 한 아이를 살리려 다른 아이를 죽이는 것이 가능한가? 이는 당신이 (나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건 내겐 불가능한 일이다. 그게 나의 한 아이를 살리는 길일지라도, 나의 아이를 죽이는 것은 내가 의지(will)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다. 내겐 내게만 성립하는 의지적 필연성(volitional necessity)이 있다. 이 필연성은 어디에 근거하는가? 물론 사람임이란 일반적인 정의적 본질에 근거할 수 없다. 사람마다 원초적 개체성이 그의 본질에 해당한다는 것을 이해하면 우리는 이런 의지적 필연성의 근거를 원초적 개체성의 본질성에서 찾을 수 있다. 당신의 이것임 혹은 원초적 개체성은 당신이 의지할 수 있는 행위의 범위를 근거 짓는 원초적 힘(power)이다. 이런 생각을 위해선 기계론적 자연관을 버려야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과학적 세계관을 버려야 하는 것은 아니다. 기계론적 자연관의 틀에서 벗어나지만 과학적 합리성과 충돌하지 않는, 이런 노선에서의 형이상학적 탐구는 앞으로 필자가 수행할 과제이다.
- 이 글은 2020년 2월 Marc Sanders Prize 논문 경연에서 Honorable Mention을 받은 한성일 교수님의 논문 “Essense and Thisness”에 대한 소개입니다
* 제51호 인문대 소식지 '연구동정'에 게재될 글을 위와 같이 싣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