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논단] [교수논단] 학자의 길을 통해 얻은 여성됨에 대한 자각(조은수 철학과 교수)
교수 논단 글을 부탁받고 뭔가 회고적인 마음 상태로 빠져드는 것을 피하기 힘들었다. 공부의 길에 들어선 70년대 후반에서 현재 2020년까지 40여 년의 기간 동안 한국사회에 문화, 경제적 기반, 테크놀로지 등 여러 측면에서 엄청난 변화가 있었지만, 젠더 지형도의 변화보다 더 대폭적인 변화는 없는 것 같다. 내가 대학에 들어온 70년대는 서울대에 여학생이 한 자리 숫자에 불과했으며 (지금은 거의 반을 육박하고 있지만), 당시 인문대에 여교수님이라고는 한 분 밖에 없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변화의 기미가 일어나던 때이기도 했다. 내가 죽을 기를 쓰고 입학한 철학과 대학원에 ‘비본과’ 여학생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여, 5동 4층의 대학원생 연구실을 근거지로 대차게 공부를 시작하고 있었다. 같이 공부했던 동학들은 후에 각자 다양한 길을 택했지만, 끈기 하나는 알아준다던 말을 듣던 나는 인문대 6동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여기서 나 자신의 행운을 자축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때 같이 공부하던 그 동료들과 선배언니들의 결기가 참 대단하였고 나는 그분들을 닮으려는 마음 하나로 여기까지 왔음을, 그분들에게 힘찬 존경의 경례를 올리고 싶다는 뜻에서 하는 말이다. 어느 날 연구실에서 어떤 남자 대학원생이 학과에 조교를 뽑는다는 소식을 전하기에, 나도 한번 내볼까 말했더니, “여자는 절대로 안 될 걸” 하면서 웃던 그 모습에 정신이 화들짝 들어 그 다음해 여름 나는 다섯 살 아이를 뒤로 하고 유학길에 올랐다. 이후 몇 번 있었던 이 같은 에피소드들이 결국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자극제가 되었다.
미국에서 세상이 넓은 것을 보고 원래 관심을 두었던 산스크리트어 문헌들도 공부할 수 있었다. 1997년 버클리 대학에서 인도 아비달마 불교의 불설(佛說) 개념이 동아시아 불교에서 어떻게 재해석되었는지를 분석하는 논문으로 학위를 마쳤다. 그후 미국 미시건 대학에서 한국 불교와 한국학 담당 조교수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런데 그곳에 여교수와 학문후속세대 대학원생들이 정기적으로 같이 만나 양방향 멘토쉽을 나누는 모임이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러한 시스터후드가 자연스럽게 형성될 수 있는 그들의 제도와 문화가 부러웠다. 그들과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연대의 경험을 쌓아가면서 대학 내에서의 젠더 문제에 점점 눈을 뜨게 되었다.
2004년 모교로 돌아온 후, 해외에 봉직하다가 한국 학계에서 활동하게 된 이력이 한국불교철학과 한국사상을 해외 학계와 소통시키는 교두보 역할로 자연히 이어지게 되었다. 개인적으로는 해외에서 인도불교를 비롯한 불교학의 여러 갈래를 넓게 공부한 경험과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원효 사상 등 한국 불교를 동아시아 불교사상사, 나아가 인도불교의 맥락과 철학적 관점에서 천착해 보는 작업을 수행했다. 동아시아 불교의 오랜 학술 전통인 경전 주해법과 주석 전통에 대한 연구도 그런 연장선상에서 나온 결과이다. 또한 불교 사상이 가지는 현대윤리학적 함의에 대해 공과 무아라는 대승 불교의 중심 개념이 현대의 실존적 위기, 즉 소유와 갈등과 분쟁으로 야기된 인간 소외의 삶에 대해 어떤 대안적 삶의 관점을 제시해 줄 수 있는지를 탐구하는 보다 대중적이고 실천적인 주제에도 관심을 쏟게 되었다.
그러다가 만나게 된 것이 고대 인도 붓다 당시 깨달음을 구해 수행의 길을 떠났던 여성들에 관한 기록과 그들이 남긴 시를 비롯해, 근현대 한국 불교사 속에 오직 편린으로 남아있는 비구니들의 자취와 기록이었다. 가지 않은 길을 선택한 그 여성들에게 특별한 애정을 갖게 되었고 연구를 통해 그들과 더 깊이 만날수록, 나는 내 삶의 저 깊은 무엇과 맞닿는 울림을 느끼게 되었다. 해외에는 수많은 여성 연구서들이 나와 있는데 비해 국내의 불교계 내에서 여성에 대한 연구는 불모지인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이 동력이 되어 『불교와 근대, 여성의 발견』이라는 제목의 여성의 관점에서 쓰는 한국의 근대 불교사를 마무리하였다.
돌이켜보면 결국 이러한 학문적 관심은 나의 개인적 성장과 자기실현과 관련을 갖는 것이었다. 여성학에서 등장하는 철학적 주제들의 천착을 통해 자신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얻을 수 있었다. 한편 국내 철학과에서 가르치는 몇 안 되는 여성교수라는 사명감도 항상 나를 일으켜 세우는 힘이 되었다. 지금 한국의 젠더 지형도는 급격히 변했지만 미래를 조망할 때 앞으로 할 일은 여전히 산적해 있다고 생각한다. 2년 전 우리 대학의 여교수회 회장을 맡아 국·공립대학 여교수회 연합회라는 전국적 네크워크 결성에 작은 역할을 한 적이 있는데, 그 기반위에 여러 사람들의 노력과 개인적, 집단적 도움이 보태져서 여성교원의 채용확대를 위한 법제화가 곧 눈앞에서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경험들을 통해 사회적 실천과 역사 발전에 주체적 참여가 결국 나의 삶의 지평을 넓힌다는 것을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 2020-1학기 소식지에 게재된 교수논단 글을 위와 같이 싣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