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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논단] [교수논단] 산중순례(최종성 종교학과 교수)

2020-05-11l 조회수 1880

    19399월에 발간된 천도교 잡지 신인간(138)에는 조기간(趙基栞, 1892-1969)4쪽 분량으로 작성한 성사와 적멸굴이란 글 한편이 실려 있다. ‘성사란 수운과 해월을 이은 천도교 3대교주인 의암 손병희(孫秉熙, 1861-1922)를 뜻하며, ‘적멸굴이란 경남 양산의 천성산에 소재한 자연동굴을 가리킨다. 글을 더듬어 읽어보니 글쓴이가 18살이던 190912월에 교단의 어른들(최준모, 임명수, 김상규)과 함께 의암을 모시고 멀리 천성산으로 49일간의 기도여행을 떠났던 30년 전 과거를 회고하는 내용이다. 눈에 띄는 것은 그 옛날 수운이 기도했다는 천성산 적멸굴을 찾아가게 된 사연과 그 소회를 밝힌 대목이다. 당시 49세를 맞은 의암에겐 그 옛날 교조 수운이 49일간 기도했다는 천성산으로 49일간 기도의 순례를 떠나는 것 자체가 무척이나 남달랐을 것이다. 무엇보다 10살에 입교한 뒤 18살의 어린 나이에 교단의 베테랑 수도자들과 함께 산중의 독공(篤工) 행렬에 가담할 정도로 종교적으로 조숙했던 저자 조기간에게도 감개에 젖었던 잊지 못할 경험이었을 터이다.

    5인의 의암 일행이 찾았던 적멸굴은 동학을 일으킨 수운 최제우(崔濟愚, 1824-1864)49일 기도를 하다가 도통한 끝에 수리가 되어 날아갔다는 신비한 전승이 응축된 신화적 장소이다. ‘도는 개 배 채우고 누운 개 옆 채인다했으니 한 번 돌아보는 수밖에. 쏘다닌다고 해서 꼭 배를 채우리란 법은 없겠지만 그렇다고 게으름 피며 눌어붙어 있다가 옆구리 채이기는 싫으니 말이다. 사실, 동학 하면 산보다는 들판이 먼저 떠오른다. 그러나 이번엔 산으로 간 동학이다.

    저 갑오년(1894), 호남과 호서의 들녘에서 들불처럼 타오르던 동학군의 함성을 예비했던 영적 각성이 그보다 한 세대 남짓 이전에 영남의 산중에서 촛불로 피어났던 곳이 바로 천성산이다. 수운은 경주에서 출생하였지만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방황을 거듭하다 처가가 있던 울산 여시바윗골 초당에 거처하며 구도의 길을 모색하였다. 그러던 중 금강산으로부터 온 노승으로부터 을묘천서(乙卯天書)’라 불리는, 기도의 가르침이 담긴 비서(祕書) 한 권을 건네받은 뒤 장차 기도 여행을 도모한다. 을묘년(1855)에 기도의 책을 받고 이듬해와 그 이듬해에 거푸 울산으로부터 백리 길 떨어진 양산의 천성산을 찾아 장기간의 기도에 집중했던 것이다.

    천성산은 원효의 이야깃거리로 넘쳐나는 그야말로 원효의 산이요, 불교의 산이다. 내원사(內院寺)를 비롯해 산곡 도처에 있는 암자들이 원효와 얽혀 있다. 수운의 기도터를 찾아 내원사 계곡에 발을 내딛는 초입에 산령각(山靈閣)이 아담한 돌담을 두르고 서 있다. 산신각이라면 뒷방 할배마냥 대웅전 뒤켠을 지켜야 할 터, 아직 절의 자취라곤 보이지도 않는 관문에 산령각이 앞서 있다니 이상한 일이다. 그럴만한 사연이 있긴 했다. 원효의 신통력 덕분에 목숨을 구한 중국인 천명의 사부대중이 원효를 찾아 신라 땅을 방문했는데, 당시 수도처를 찾으려던 원효와 천명의 제자 일행을 영접하며 길안내를 해주던 산신이 자신의 소임을 다하고 홀연히 사라진 곳이 지금의 산령각 자리라고 한다. 터줏대감 노릇하던 산신이 신세대, 신종교 격인 원효와 그 제자들에게 자리를 내어주며 바톤을 터치한 곳에 산신이 모셔져 있으니 자연스럽기도 하다. 산신의 안내를 받아 산중에 깃든 천명의 외인들은 원효의 가르침을 따라 불도를 닦은 끝에 성인이 되었다고 하니 그 내력이 천성산(千聖山)의 이름에 고스란히 들어있다. 소금강산이라 불릴 만큼 천성산의 내원사 계곡은 절경의 연속이다. 한 오리쯤 정신없이 탄식을 쏟아내다 내원사에 당도하고 보니, 과연 경내 뒤꼍에 산신각은 따로 없다.

    수운 당시 통도사의 말사인 암자(내원암)였지만 어느덧 번듯한 위용을 갖춘 비구니 사찰로 거듭난 내원사를 그저 눈요기하듯 둘러보고는 이내 수운의 기도터로 알려진 적멸굴로 발걸음을 재촉한다. 해묵은 낙엽이 수북이 쌓여 길을 분간해내기 어려운, 인적 끊긴 가파른 험로를 찾아가기란 초행자에겐 버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입산하기 전, 산 아래 토박이 어른으로부터 들었던 지형지물들을 머릿속에 단단히 구겨 넣고 오른다지만 숨이 고갈되고 수분이 소진되는 사이에 길에 대한 자신감도 상실되고 만다. 반신반의하며 50분을 버텨내며 오른 끝에 적멸굴 가까이에 닿는다. 숨을 고르고 옷깃을 여미고는 동굴 입구로 다가가니 옛 원효대사 수도처 입구라 적힌 푯말이 눈길을 끈다. 몇 사람이 거처하며 비바람을 피할 만큼 동굴은 널찍하고 안쪽엔 기도객의 목을 축여줄 만큼 고인 샘물도 충분하다.

    원효의 수도처이던 이곳에 한때 동학을 예비하던 수운이 머물며 기도했다니 수운의 수도처라고도 할 만하다. 1860(경신) 4월 경주 구미산 용담정에서 득도하기 3년 전, 수운은 이곳 적멸굴에서 숙원이었던 49일간의 기도를 끝냈다고 한다. 1200여 년 전 부처에 집중하던(念佛) 원효의 수도처를 수운이 잠시 빌려 하느님의 가르침을 받고자 몰입했다니(念天), 한낱 개도 부린다는 텃세는커녕 경쟁을 뛰어넘는 종교적 교감이 어릴 뿐이다. 원효와 수운은 천년의 격세에도 불구하고 각기 자신이 처한 시대적 사명을 나눈 기도의 선구자로서 천성산 적멸굴에서 교차하고 있는 듯하다. 이름 그대로, 원효가 색다른 기도로 어둠에 휩싸인 고대를 동트게 했던 첫새벽(元曉)이었다면, 수운은 또 다른 기도로 갈급한 근대의 새벽을 촉촉이 적셔준 비구름(水雲)이었다고 한다면 과장일까. 산신이 원효에게 길을 안내해주었듯이 원효는 수운에게 아량을 베풀며 자리를 내어준 것이라고나 할까.

    천성산 기도를 마친 수운은 이태 뒤 고향 경주로 돌아온 뒤 1860년 구미산 용담정에서 대각을 얻고 동학을 창도하기에 이른다. 천성산 적멸굴의 기도를 원천 삼아 경신년(1860)의 동학이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경신년의 동학은 녹두장군으로 대변되는 갑오년(1894)의 동학을 불러온 종교적 자양분이었다. 갑오년 이후 급변하는 근대적 환경 속에서 동학도들은 천성산에 남겨진 교조의 발자취를 찾아 기도의 순례를 이어갔다. 1909년 천성산에 들어와 적멸굴을 찾았던 의암 일행의 순례는 그 효시 격이었다. 수운과 해월의 도통을 이었다고 자부했던 의암이지만 사실 그는 살아생전에 수운을 대면한 적 없는 손자뻘 교주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멸굴에 당도하자 그를 만나본 듯 종교적 희열을 억누르지 못한 채 입 밖으로 몇 마디를 쏟아내고 말았다.

昔時此地見 옛날에 이곳을 와보았는데
今日又看看 오늘 또다시 와보는구나!

    일견 문학적으론 별 감흥 없는 평범한 시구로 보이지만, 몇 번 되새김질 하다보면 세대를 넘나드는 오심즉여심(吾心卽汝心)의 일체감을 발견하게 된다. 천도교에서는 이를 성령출세설(性靈出世說)’, 즉 우주 만물이 하나의 본래적 영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는 교리를 뒷받침해주는 에피소드로 활용하고 있다. 외형적으로 보자면 수운과 의암은 세대의 격차를 둔 개별적인 존재로서 서로의 경험을 공유할 리 없다. 옛날에 적멸굴에 왔던 이는 수운이고 오늘 온 이는 의암일 뿐이다. 그런데 일원론적 시선으로 보자면 과거의 수운과 오늘의 의암은 하나의 근원적인 영으로부터 표출된 동일 존재로서 시간의 한계를 넘어 경험을 공유할 수 있는 사이가 된다. 따라서 옛날의 수운은 오늘에도 다시 와볼 수 있고, 오늘의 의암은 옛적에도 와본 적 있다는 고백이 가능해진다. 과거와 현재가 만나고 옛사람과 오늘의 사람이 교감을 이루는 순례의 이상이 이보다 더 잘 표현될 수 있을까 싶다. 기도라면 청맹과니인 나도 외마디 내뱉으며 가파른 산길을 내려온다. “, 나도 오늘 와보았구나!” 산학(산신)과 불학(원효)과 동학(수운)이 공존하는 천성산을.

* 2019-2학기 소식지에 게재된 교수논단 글을 위와 같이 싣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