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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논단] [교수논단] 인문학과 불교학 - 인문대학 연구상 수상 안성두 교수

2021-04-16l 조회수 74

인문학과 불교학

인문대학 철학과 교수 안성두


불교철을 공부하면서, 그 사상사적 흐름이 서양 근대철학의 흐름과 유사한 점이 많다는 점에 놀란 적이 있다. 물론 그 다름은 문화와 학문적 전통의 차이에 의거해 볼 때 당연한 것이지만, 키플링이 동은 동이고, 서는 서이니, 둘은 결코 만나지 못하리라고 읊은 것처럼 언제나 평행선을 달리지는 않을 것이다. 양자의 유사함은 적어도 출발점에서 모두 의식의 문제에 일차적 관심을 갖고 있다는 점에 기인한다고 생각된다. 데카르트의 코기토(cogito)는 적어도 생각한다는 것을 가장 근본적인 확실한 사실로 간주한다는 점에서 지각과정의 분석에 초점을 맞춘 초기불교 이래의 불교전통과 상통할 것이다. 물론 불교에서 지각과정의 분석은 cogito가 전제하는 생각한다가 그렇게 불가분적으로 묶인 것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양자를 해체시키려는데 목적이 있지만 말이다.



불교에서 구체적인 구제론적 메시지를 기대하는 사람들이 불교교설을 접할 때 낯선 인상을 갖는 이유는 아마 종교로서의 불교가 단순하고 명확한 메시지를 주는 대신에 복잡한 심리학적 설명을 제시하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철학과 종교의 상보성은 인도전통이 공유하는 특징이기도 하고 또 서양 중세철학에서 아우구스티누스도 말하고 있는 바이지만, 문제는 붓다 자신이 전문적인 술어를 사용해서 설법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비근한 예가 초기불교 이래 가장 중요한 가르침으로 간주되었던 세 개의 기본 교설이다. 여기서 오온설(五蘊說)은 인간이 물질적 요소들과 심리적 요소들의 복합체라고 설명하는 것이고, 십이처(十二處)와 십팔계(十八界)의 두 교설은 지각과정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고 진행되는가를 설명하는 것이다. 붓다는 특히 후자를 一切라는 형용사로 표현하면서 이 교설의 중요성을 매우 강조했다. 언뜻 보면 이 교설들은 불교가 지향하는 해탈과 열반의 목적과 그다지 관계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의미를 고찰해 보면 불교의 특징적인 관점들이 잘 드러나기에 불교학이 어떤 점에서 인문학과 연결될 수 있는지도 드러날 것이다.


12처란 우리의 지각은 감각기관과 그것들에 대응하는 인식대상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것들이 모두 6쌍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분류해서 보여주는 하나의 범주로서, 예를 들어 눈이라는 감각기관과 그에 대응하는 형태와 색깔, 또 귀와 그에 대응하는 소리, 마지막으로 심과 그에 대응하는 기억과 관념 등의 요소이다. 18계란 바로 눈과 색깔 등이 주어졌을 때, 시각적인 앎, 또는 청각적인 앎 등이 생겨난다는 것을 보여준다. 가장 기본적인 지각을 이렇게 분석하는 이유는 의식작용은 존재하지만, 코기토가 전제하듯이 이를 라는 행위자 내지 행위주체와 결합시킬 필요는 없음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그렇다면 18계의 이론이 함축하는 바는 무엇인가? 붓다가 이를 일체라고 말했을 때, 이는 일체의 세계에 관한 경험이 바로 능-소 관계로 구성된 지각 자체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의 세계에 대한 지각은 근본적으로 우리의 감각기관과 대상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먼저 지각이 감각기관에 의존하고 있다는 주장을 보자.


우리는 색깔이 과연 자연적으로 존재하는가 아니면 우리들의 의식에 의해 구성된 것인가에 대한 논쟁이 18세기 유럽에서 벌어졌음을 알고 있다. 이는 우리의 인식이 생물학적 감각능력에 어느 정도 의존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우리는 비슷한 문제의식이 붓다에 의해 제기되었음을 본다. 그는 지각은 근본적으로 감각능력에 의존하고 있다고 말함으로써 모든 유정들이 각기 그들의 감각능력의 범위에 따라 인식할 뿐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후대에 <一水四見>으로 잘 표현되고 있는데, 예컨대 인간은 커다란 물의 흐름을 강이라고 보고, 물고기는 집으로, 아귀는 고름에 가득 찬 것으로, 그리고 천신들은 유리보석으로 본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생물학의 발전에 따라 모든 생명체는 그들이 속한 종에 따른 인지능력에 의존하여 대상을 인식한다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만, 붓다 당시나 그 이후의 인도 실재론자들에게 이 주장은 대상의 독립된 존재성을 부정하거나 파괴하는 것으로서 용인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제 지각이 대상에 의존하고 있다는 18계설의 두 번째 측면을 보자. 불교와 대척점에 서 있던 인도의 실재론자들에게 색깔이나 형태 등은 심과 독립해서 존재하는 것이며, 지각은 의식작용의 외부에 있는 대상을 직접접촉이나 그 대상의 모사인 관념상을 매개로 해서 파악하는 것이다. 반면에 지각이 대상에 의존하고 있다는 설명에 함축된 메시지는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지각과 인식대상의 상관관계이다. 후대에 불교에서는 대상을 파악하는 지각작용을 능취(能取), 이런 능취에 의해 파악되는 대상을 소취(所取)라고 명명하면서, 양자 사이에 깊은 상관성을 강조한다. 이러한 능-소의 상관성은 어떤 의미에서 현상학의 창시자 후설이 말하는 noesis-noema 상관관계에 대응할 것이다. 이러한 상관관계가 후설의 지향성(Intentionalität) 개념에서 도출되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불교에서 양자의 상관성은 의식은 반드시 대상을 가진다는 규정과 직접 관련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의식의 분석에서 시작한 동서양의 두 전통이 보여주는 유사성이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많은 학자들의 주목을 받은 것은 특이한 일은 아닐 것이다.


다른 하나는 능-소의 상관성에 입각하여 인식대상의 존재를 의식 외부에(out there) 놓는 대신에 의식 내부에 설정하려는, 불교사상 내부에서 점차 강화되어가는 경향이다. 이런 추세의 정점에 필자가 공부하는 유식(唯識) 사상이 있다. ‘유식이란 단지 표상(idea)만이 존재한다는 선언에 다름 아니다. 표상이 진행되는 장()은 의식작용의 밖에 있는 것이 아니기에, 이 주장은 흔히 만법유식(萬法唯識)이나 심외무물(心外無物)로서 일종의 불교관념론으로 해석되는 경향이 강하다. 하지만 주체이든 대상이든, 이는 우리의 경험을 능-소의 방식으로 구분하고, 이를 언설로 표현하고 개념으로 확정함에 의해 객체화시키려는 이해방식에 대한 비판으로서, 즉 언어비판이나 사고비판으로 해석하는 것이 유식사상의 본래 취지에 부합될 것이라 생각한다. 여하튼 이러한 심리철학의 주제를 다루는 유식사상이 삼국시대에 수입된 이후 통일신라시대에 원효를 위시한 많은 유식사상가들을 배출한 것을 보면 당시 신라 지성인들에게 이런 의식작용의 분석은 상당히 어필했다고 보인다.


유식에 따르건 아니면 초기불교에 따르건 간에, 지각과정 분석의 목적은 무아(無我)’를 설하기 위한 것이다. 무아란 이해하기 어렵고 또 불교가 중시하는 경험의 흐름의 분석과도 모순된다고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 무아를 반본질주의의 맥락에서 이해한다면 납득하기 쉬울 것이다. 지각과정 속에서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변하지 않는 본성을 갖고 지속하는 동일한 행위자를 전제하고 있지만, 18계의 분석에서 보면 그런 불변하는 행위자는 경험적 차원에서건 형이상학적 차원에서건 결코 확인될 수 없다는 것이다. 마치 나르시시스적 갈망처럼 우리는 무상하고 변하는 이 세계에서 불변하는 성채를 구축하려고 하지만, 지각과정의 분석을 통해 붓다가 보여주고자 한 점은 그것이 우리의 불변성에 대한 욕구와 또 그것과 결합된 언어적 실체화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런 지각의 분석이 주는 실천적 의미는 분명할 것이다. 가장 확실한 나의 것처럼 보이는 지각조차도 사실은 감각기관과 대상에 의존해서 생겨난 것이라고 본다면, 그것의 확실성에 대한 우리의 태도와 판단은 완화되고 유연하게 될 것이다. 많은 경우 그런 판단의 배후에 놓인 자아의식과 그것과 결부된 이기적 태도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 무아설이 주는 실천적 교훈일 것이다.


우리 철학과에서 가르쳤던 시더리츠 교수는 영국의 철학자 파핏(D. Parfit)을 인용해서 인간을 경험의 다발로 환원시켰을 때 보다 구체적인 윤리적인 이타성의 근거가 확보될 것이라는 주장을 소개하면서, 그것과 불교의 환원론과의 유사성을 지적하고 있다. 사실 이는 많은 불전 속에서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바이기도 하다. 나를 구성하고 있는 심리적, 물질적 요소가 타인을 구성하는 그것들과 하등 구별될 수 없다면, 또 내가 고통을 피하고 즐거움을 추구하고자 하는 점에서 타인들과 하등 다를 바가 없다면, 왜 그것이 꼭 나의 즐거움이 되어야만 하는가를 무아설은 묻는 것이다. 모든 생명체가 지각을 가진 有情(sentient being)이며, 또 모든 유정들이 상호 의존하는 생명공동체의 일원이라면, 타인들에게 좋은 것이 결국 에게도 좋은 결과로 돌아온다는 점을 보여주려는 것이 무아설의 목적일 것이다.


불교의 위대함은 그렇지만 이런 이론적 설명에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를 체화하기 위해 노력했던 많은 인간들이 존재했었고, 그리고 우리가 그들과 동일한 심적, 물리적 요소를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세계내존재로서의 우리를 깊이 위로해주는 것이다.


* 제52호 인문대 소식지 '교수논단'에 게재될 글을 위와 같이 싣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