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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다작의 비결은 무엇일까요?" - 주경철 교수 인터뷰

2017-11-03l 조회수 3701

 
인터뷰 진행 : 이진실(미학과 박사 수료), 황수경(동양사학과 박사 재학)
 

1. <일요일의 역사가>는 역사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역사가가 들려주는 역사의 중요한 순간들과 같은 느낌이 듭니다. 문학, 그림, 영화 등과 접목되는 역사 이야기들로 ‘이야기꾼’과 같은 선생님의 면모가 드러나는 저술 같습니다. 책에 대한 소개와 이런 책을 내시게 된 계기는 무엇인지요?

- 이 기획은 이 글을 연재했던 <현대문학>쪽에서 먼저 제안을 한 거긴 해요. <현대문학>이 문학잡지지만 역사가들 이야기도 들어보면 좋겠다고 하면서 연재를 부탁했습니다. 역사이야기지만 문학작품과 접점이 되는 이야기를 해줄 수 있느냐는 거였지요. 나는 뭐 하라고 하면 하니까요(하하). 문학 분야에서도 이런 이야기에 흥미를 느끼겠지만 반대로 역사가의 입장에서도 문학에 관심을 안 가질 수 없지요. 두 분야는 나뉘어 있지만 인간이란 무엇이고 사회란 무엇인가라는 공통의 관심사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물론 역사학은 사료를 가지고 엄밀하게 조사하는 태도를 가지고 있는 반면, 또 세밀하게 인간사를 읽어내는 것이 문학의 강점이지요. 이런 두 분야의 중간 영역을 상정해보고 그런 영역의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저도 가지고 있었어요. 그래서 꼭 문학 작품이라 지칭되지 않는 넓은 의미의 ‘텍스트’, 문학적인 것들을 놓고 역사이야기 겸 문학이야기를 해보자 생각한 겁니다. 이 책에는 고전이라 할 수 있는 고대의 비극 작품도 나오고, 역사적인 사건 실화(‘바타비아: 유럽문명의 무덤’), 또 유명한 역사가가 민중문화에 대해 분석한 이야기(‘고양이와 여인: 근대 유럽의 저항 문화’) 등이 있어요. 이렇게 기존과는 좀 다르게 읽어볼 수 있는 열한 가지 테마를 구성해본 겁니다.
 
 

2. 이 책은 그리스 비극에서 2차 세계대전의 홀로코스트를 다룬 작품들까지 망라하고 있는데요. 각각의 시대와 테마를 선정하신 기준이 있으신지요?

- 고대에서 현대까지 어떤 사건들을 시대별로 구분해서 넣자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어요. 막연한 플랜 같은 거만 있었다고 할까요. 넓게 조망해보자는 취지니까 지역이나 시기 안배 정도 구색은 갖춰보자 했지요. 그런데 특히 현대에서 제일 생각해볼 만한 텍스트는 아무래도 영화더라고요. 때문에 현대 부분에서는 영화로 역사읽기를 시도해봤어요. 사실 이 중에는 제가 교양 수업에서 다룬 것들도 꽤 있어요. 특히 홀로코스트 영화들이요. 영화 매체의 특성에 대해서는 길게 제가 말할 순 없지만, 영화라는 매체는 굉장히 파워풀하면서도 위험하기도 하잖아요. 이미지라는 것이 워낙 강렬한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지요. 많은 사람들에게 접근할 수 있고요. 또 다큐멘터리나 인터뷰 작업의 경우에는 역사가의 입장에서는 또 다른 사료적 가치를 가지기도 하지요. 가령 홀로코스트 희생자를 찾아가서 인터뷰하고 그걸 배치하는 과정을 보면 그런 작업이 아니었다면 자신의 이야기를 못했을 사람에게 직접 발언을 하게 한다는 점에서 영화라는 매체는 새로운 가능성의 매체란 생각이 들어요. 기존의 사료를 해석하는 게 아니라 새로이 사료를 창출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식으로 텍스트 형식 자체에 깊이 들어가는 이야기를 하기보다는, 제가 할 수 있는 정도의 이야기를 하면서 역사와 영화, 문학, 그림이 만나는 지점들을 탐사해 본거죠.
 
 

3. 단순히 클래식한 작품들이 아닌 대중문화나 사건의 기록과 같은 다양한 성격의 재현물들, 말씀하신 넓은 의미의 ‘텍스트’들을 택하신 점이 흥미로운 것 같습니다.

- 그것들은 넒은 의미의 문학인거죠. 문학작품 그 자체를 분석하고 해석하는 작업은 저보다 잘하시는 분들이 많고 또 많이 했다고 봐요. 아무래도 저는 역사가니까 어떤 문학 고전이나 정전을 통해서 작품의 핵심을 읽어내는 것과는 다르게 그동안 빛을 받지 못했던 이야기들, 가려져 있던 부분을 읽어내고 싶었지요. 중요하긴 한데 아직 그렇게 주목받지 않았던, 혹은 여태까지는 다르게 주목받았던 것들을 읽어보자는 생각을 했습니다.
 
 

4. 선생님의 다른 저술들에서는 거시적인 사건부터 소소한 문화현상까지 함께 짜들어가는 시각이 엿보입니다. 평소 독서, 영화, 문화생활을 어떻게 하시는지 궁금합니다.

- 옛날에는 영화를 좋아해서 굉장히 많이 보는 편이었어요. 요즘은 너도나도 영화이야기를 하는데, 저는 지금 좀 시들해졌어요. 인문학에서 영화이야기를 거의 안하던 시기, 90년대에 제가 우리 과에서 ‘역사와 영화’라는 과목을 처음 만들었어요. 그 때 한 학기 끝나고 나서 학생들의 평가나 감상을 보면, “내 평생에 이렇게 흑백영화 많이 본 게 처음이다.” 그렇게 말하곤 했었지요. 한참 동안은 저도 희귀한 영화, 개봉된 영화 다 찾아볼 때가 있었는데, 누구나 그럴 때가 있는 거 같아요. 요즘엔 농담으로 영화 끊었다고 이야기해요.(하하) 요즘 유일한 문화생활이라면 번역이지요.(하하) 질리도록 하고 있어요. 여섯 명이 공역하고 있는 책이 있는데 그 작업에 매어있는 게 현실입니다.
 
 

5. 무슨 책인지 예고 좀 부탁드려요.

- 페르낭 브로델의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와 지중해 세계』라고 역사가들이 가장 많이 거론하는 20세기 역사서 고전 중의 하나입니다. 역사학의 황제라는 별명을 가진 역사가의 저작인데, 엄청나게 거대한 시각과 여러 차원의 시간성으로 역사를 들여다보는 책이라 할 수 있어요. 워낙 큰 책이고 문장이 까다로워서 다들 엄청나게 고생하고 있습니다.
 
 

6. 지난해만 해도 두 권의 책을 출간하셨어요. 연구와 강의를 병행하시면서 이렇게 다작을 하시는 비결이 뭔지 궁금합니다.

 - 원래 제가 계속 해오던 작업, 또 구상하는 작업, 이런 식으로 항상 몇 가지 작업이 동시에 진행되는 것 같아요. 그러다가 어떤 시점에 하나씩 맺어지는 거지요. 글을 쓰는 작업이 차분한 시간을 필요로 하지만, 무엇보다도 손에 익어야 하잖아요. 머릿속에는 있는데 안 나오는 경험 누구나 하잖아요. 그게 한참 쓰고 있는 동안에는 글이 웬만큼 써져요. 그날 생각한 것은 하루 저녁에 어느 정도 글로 맺어지는 식으로요. 그런데 저도 한동안 안 쓰다가 쓰려면 잘 안되지요. 글을 잘 쓰자면 흐름을 타야 하는데 그 흐름이라는 게 몸에 익히는 것이에요. 몸에 익으면 훨씬 글이 잘 진행되지요. 수학도 머리로는 아는데, 막상 문제를 푸는 건 잘 안 되는 경우가 있대요. 수학 교수님들도 문제는 조교들이 더 잘 푼다고 해요.(하하) 그런 걸 두고 손에 익었다고 하잖아요. 글을 쓰는 것도 마찬가지로 그런 작업인 것 같아요.
 
 

7. 정말 회의도 많고 일정도 많으셔서, 차분히 흐름을 가지고 글쓰는 게 힘드실 것 같은데요 어떻게 글 쓰는 시간을 안배하시는지 궁금해요.

- 정말 시도 때도 없이 회의가 많죠. 그런 거 생각하면 글 쓰는 작업을 못하지요. 그냥 한 시간 일 있으면 뛰어갔다 오고 다시 쓰고… 옛날에는 그런 모드 전환을 잘 했어요. 요즘엔 다시 글을 쓰려고 앉으면 종종 딴 생각도 하고, 신문도 좀 보고 그러는 것 같아요.(하하) 어차피 바쁘고 자기 시간을 충분히 가질 수 없는 상황이니까 그때그때라도 해야지 생각하고 그런 면에 좀 능한 편인 것 같아요. 그렇게 하려고 또 메모도 틈틈이 하고, 노트도 많이 만들지요.
 
 

8. 인문학의 위기를 말하곤 합니다. 어떻게 보면 인문학이 대중들과 접하게 되는 기회들은 넓어지고 있는데 아카데미 안에서는 위기감을 느끼기도 하는데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 돌이켜 보면 인문학이 편한 시기는 없었던 것 같아요. 정치적이든 경제적이든 인문학에는 여러 가지 위기가 늘 있어왔다고 봐요. 위기라는 말 자체가 뭔가 충돌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위기 자체를 다르게 해석해볼 필요도 있는 것 같아요. 인문학이 현재의 사회,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뭔가 할 말이 많다고 볼 수도 있을 겁니다. 또 넓게 보면 지금 시대는 인문학뿐 아니라 모든 학문 자체가 위기라고 할 수도 있는 것 같아요. 외부의 힘이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인데, 어떻게 대응을 잘 하느냐가 관건이라고 봐요. 오히려 진짜 문제는 그 힘에 대응하는 탄력성이 떨어지는 것이라고 봐요. 그래서 내부를 좀 더 성찰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물론 제도적인 위험이 있지요. 학문후속세대가 계속 자라나야 하는데 인문학을 해도 경제적으로 힘들 수 있다는 현실, 아무리 인문학을 하고 싶어도 그런 이유 때문에 할 수 없게 되는 현실이 피부로 느끼는 위기겠지요. 그런데 달리 생각해보면, 이 부분도 심할 때, 덜할 때의 주기가 있는 것 같아요. 제가 너무 한가한 이야기를 하고 있나 싶어 미안한 생각도 드는데, 인문학도들에게 너무 걱정하지는 말라고 이야기하고 싶어요. 이야기하신 것처럼 인문학이 대중과 만나는 접점이 확대된다는 것은 이 사회가 인문학의 필요를 느끼고 있고, 그에 대한 요구도 강하기 때문에 분명 수요가 있다고 보고요. 물론 엄밀한 학문을 추구하는 것과 다양하게 인문학을 소개하는 것과 각각 층위가 다양하겠지만, 앞으로 다양한 수요를 창출해낼 수 있는 여지가 있다고 생각해요.
 
 

9. ‘인문학의 미래’ 혹은 ‘비전’이란 말이 좀 거창하기는 하지만, 우리가 인문학을 계속 해나가야 할 가치와 희망이 있다면, 그것을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 우리 사회는 앞으로 더 크게 변화할 겁니다. 인공지능이나 과학기술의 발전이 엄청나게 가속화되고 있고, 작년이나 올해 초 우리가 보듯이 세계정세도 혼란하지요. 정신을 못 차릴 정도라고도 여겨져요. 이럴 때일수록 그러한 사회에 대해 차분하게 생각해보고 의견을 나누는 것이 인문학이 하는 일이잖아요. 때문에 인문학에 대한 갈증은 갈수록 더욱 커질 것 같아요. 다만 인문학이 너무 고루하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해요. 인문학자들이 사회변화, 과학과 같은 분야에서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거지요. 컴퓨터의 발전, AI 이런 것들에 대해 전혀 모르면서 오늘날과 같은 테크놀로지 사회에 대해 코멘트를 할 수는 없잖아요. 좀 더 크게 이야기하면 인문학이 과학·산업·사회과학에 수동적으로 끌려갈 게 아니라, 먼저 손을 내밀고 주도하는 자세도 필요하다고 봐요. 오늘날의 과학 발전이나 사회 변화가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안테나를 세우고 우리가 먼저 사유하는 태도, 좀 더 폭넓고 진취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10. 선생님의 연구와 집필 활동에서 앞으로의 목표(혹은 올 한해의 목표)가 있으신지요.

- 대부분의 학자들이 한 번씩 생각해보는 부분일 텐데, 저도 그간 공부해왔던 방향을 짚어보는 큰 작업을 해보고 싶어요. 제 경우엔 그 부분이 16-18세기 초기 근대사에 대한 정리겠지요. 근대 사회의 배태를 종합적으로 보는 연구를 해보고 싶은 생각은 진작부터 있었는데 계속 못하고 있지요. 그걸 중기 목표로 가지고 있어요. 돌아보면 제가 한 10년 동안 ‘총무의 시대’를 살았는데요, 이제는 그것을 넘어 소장, 회장의 시대를 맞았다가 그마저도 넘어가는 것 같아요.(하하) 그런 일들이 조금 정리되면 예전에 했던 『대항해 시대』와 같은 스케일의 작업을 한 번 더 해보고 싶어요. 또 그 전에 올해 마쳐야 할 번역들을 잘 마무리 지어야겠지요. 더 멀리 보면 은퇴 시기까지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프로젝트를 해볼까 하는 생각도 있어요. 여타 연구자들처럼 저도 책벌레처럼 책 속에만 갇혀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거든요. 음악, 문학, 역사를 아우르면서 여행하는 프로젝트를 해볼까 생각해요. 아마추어와 아카데미가 결합된 그런 프로젝트를 개발해보고 싶네요. 또 연구적인 측면에서는 대부분의 역사가들처럼 통사를 한 번 써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어요. 좀 허황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언젠가 한 번은 긴 안목으로 역사를 제시하는 작업도 해보고 싶은 거지요.
 

11. 마지막으로 인문학을 공부하는 학생 및 후학들에게 당부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신지요.

-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너무 주눅들 필요는 없다고 이야기하고 싶어요. 인문학이 없어지거나 그럴 거 같지는 않아요. 사회가 변화고 위기가 닥쳐올수록 그것을 읽어주고 해석해주고, 아젠다를 제시해주는 역할이 필요하고 그것이 바로 인문학의 본령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이야기 하면 학생들에게 조금 미안한 기분도 듭니다만 너무 비관적으로 보지 않고 즐겁게 공부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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