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대뉴스

[인터뷰] [아너스 프로그램 수기] 철학과 박성현

2022-11-08l 조회수 1400



[아너스 프로그램 수기]
유가와 법가 내 지각론(知覺論)의 『도덕경(道德經)』 수용: 한비자의 「해로(解老)」와 이이의 『순언(醇言)』을 중심으로

                                                                                                                 철학과 박성현

“우리는 거인의 어깨 위에 앉은 난쟁이와 같다. 우리가 그들보다 멀리 볼 수 있는 것은 시력이 더 좋아서가 아니라 그들의 높은 어깨 위에 걸터앉은 덕분이다.” 후배 학자의 성취는 선배 학자들이 축적한 업적에 의존한다는 사실을 이 비유보다 멋지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흔히 뉴턴이나 솔즈베리의 문장으로 알려져 있으나 중세 스콜라 철학자 사르트르의 베르나르(Bernardde Chartres)가 시초라고 합니다. 고대 희랍 철학에 정통했던 그는 자신의 견해를 개진하기에 앞서 항상 선배 학자들의 견해를 검토하고 자신이 누구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정직하게 밝혔습니다. 이러한 학문의 방법은 지금까지 이어져 선행연구
검토는 으레 논문의 한 챕터를 차지하곤 합니다.

  그런데 학부생활 동안 이 기초적 덕목에 충실하였는지 돌이켜 보면 치기 어린 과제들이 생각나 부끄럽습니다. 입으로는 난쟁이의 비유를 중얼거리면서도, 과제를 작성할 때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문득 생각난 아이디어에 갇혀 선행연구를 충분히 검토하지 않거나 평가절하하곤 했습니다. 그렇게 득의양양하게 제출한 과제가 교수님들의 피드백이라도 받게 되면 달면 삼키고 쓰면 뱉듯 비판은 외면하고 장려의 칭찬만을 골라 기억했습니다.

  3월경에 아너스 프로그램을 신청하면서 이번만큼은 거인의 어깨 비유에 충실하자고 애써 다짐했습니다. 그러나 연구를 시작하고 얼마 안 돼 어려움에 직면하였습니다. 저는 거인의 어깨 위에 성실히 올라가기는커녕 거인의 높이가 어디까지인지, 어깨 위로 올라가는 올바른 길이 무엇인지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일전에 전공수업에서 다루었던 주제라 해 볼 만한 작업일 것이라는 자만과 달리 이전 학자들이 남긴 어려운 해석과 주장들이 안개 너머로 쌓여 있었습니다. 선배 학자들이 산발적으로 전개한 학문의 흐름 속에서 해결하고자 하는 질문을 다루는 문헌을 발견하는 것부터 막막했습니다. 어떤 문헌에 설득되면 여지없이 다른 문헌에서 반론을 제기하곤 하였는데, 마지막에 읽은 문헌이 최선인 것처럼 보여도 어디에 반박 문헌이 숨어있을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기껏 골라낸 문헌들도 피상적 독해와 오독에 허덕이다 보면 해결하려던 질문이 무엇이었는지 조차 까먹는 경우가 부지기수였습니다.

  이번 아너스 프로그램을 통해 거인의 무릎 정도라도 올랐다면 다행일 겁니다. 그럼에도 거인의 무릎에서 저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값진 경험을 했습니다. 전공 교수님들의 문헌을 중심으로 하되, 해당 문헌이 비판하는 문헌, 교수님의 문헌을 비판하는 동료 혹은 후배 학자들의 문헌을 살펴보았습니다. 더디지만 문헌들의 쟁점을 정리하고 매력적인 해석을 추려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원전을 반복해 읽어가며 각 해석의 장단점을 찾고자 노력했습니다. 보잘것없지만 저만의 해석을 제시할 수 있었다는 안도감도 있습니다. 물론 이 모든 과정에서 저는 박영도, 정원재, 장원태, 정단비, 이석명, 이종성 선생님 등의 걸출한 연구에 전적으로 빚을 지고 있습니다.
 
  요컨대 아너스 프로그램은 두 가지 소중한 교훈을 주었습니다. 우선 학자들의 눈부신 성과는 거인의 어깨에 오르는 성실한 과정이 전제된다는 점입니다. 1학년 때 한 선생님께서 박사학위는 손톱 크기 주제에 관하여 모든 문헌에 숙달한 후 남긴 먼지만한 기여에 대한 증거라는 말씀이 어렴풋하게나마 이해될 것도 같습니다. 두 번째는 거인의 어깨는 그 높이를 파악하는 것조차 어렵다는 점입니다. 제가 놓친 문헌들 속에는 어떤 통찰들이 숨겨져 있었을까요? 마감 기한을 하루 넘겨 결론을 쓰고 참고문헌을 정리하며 누가 어떤 주장과 논거를 남겼는지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면서 해당 주제에 대하여 “알고 있다”고 착각했던 과거를 다시금 반성할 수 있었습니다.

  감히 정직은 학문의 기본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학문은 자론(自論)이 독자적 창조물이 아님을 솔직히 밝히고, 논증의 한계를 감추지 않고 겸허히 인정하되, 선행이론이 갖추지 못한 장점에 호소하여 타당성을 인정받으려는 다짐들이 모여 발전해 왔을 것입니다. 아너스 프로그램을 통해 이 덕목을 실천한 많은 문헌들을 접했습니다. 반면 제 졸고는 처음 목표한 것만큼 정직했을까요? 언젠가 저 스스로에 떳떳한 글을 쓸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지도를 맡아주신 정원재 교수님, 심사를 맡아주신 박정훈, 이정미 교수님, 그리고 도움을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