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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아너스 프로그램 수기 - 철학과 이지혜

2021-11-02l 조회수 3307

연구제목 : 이주노동자의 회원자격: 국가의 ‘제외할 권리’와 구성원의 선발 기준을 중심으로

철학과 이지혜

새내기 시절 존경하는 선생님 한 분께서 소크라테스에 대해 설명해 주신 내용이 3년 가까이 지난 지금에도 문득문득 생각나곤 합니다. 플라톤의 대화편에 등장하는 소크라테스는 무지를 자처하며 자꾸만 대화 상대방(interlocutor)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자신이 정답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며 곧잘 대답하던 사람들도 소크라테스의 질문이 계속되면 명백히 틀린 대답을 하거나, 대답할 말을 잃고 지적인 혼란 상태에 빠져 버리고 맙니다. 메논은 소크라테스를 상대방의 “영혼도 입도 마비(『메논』, 80b)”시키는 “전기가오리(『메논』, 80a)”에 비유하며 그를 원망하기까지 합니다. 물론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메논과 “함께 고찰하고 탐구하길(『메논』, 80d)” 바라기에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답합니다. 소크라테스의 이러한 철학적 방법론을 ‘산파술’이라고 부릅니다. 산모가 아이를 낳을 때 옆에서 도와주는 산파처럼, 소크라테스도 상대방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선생님께서는 ‘힘들게 낳은 자식 같은 논문!’이라는 농담으로 이야기를 마무리하셨지만, 산파술 이야기는 은연중에 제게 깊은 인상을 남겼던 것 같습니다. 

 

이번 학기 아너스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동안 산파술에 의해 논파당한 사람들의 입장에 저를 잠시 세워볼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인문대학에서 열리는 수업을 수강한 학생들은 수업에서 다루는 분야 또는 주제에 대한 글을 작성하는 경험에 조금은 익숙해지기 마련입니다. 배운 내용을 깔끔히 정리하고 거기에 내 생각을 더하여 글을 엮어내는 것 역시 쉬운 일이라 할 수는 없을 테지만, 글이 향해야 할 방향을 제한해 주는 최소한의 테두리가 있다는 사실은 글 쓰는 이가 쉬이 길을 잃지 않도록 도와줍니다. 반면, 아너스 프로그램은 어떤 주제에 대해 어떤 주장을 하는 글을 쓸지, 다루고자 하는 주제에 대해 어떤 선행 연구 자료를 참조하여 공부해야 할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담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길이의 글을 어떤 식으로 구성해야 할지 등 연구를 진행하는 연구자 자신이 모든 단계를 기획하고 결정해야 합니다. 오랜 기간 관심을 가져온 주제, ‘많이 알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정도는 결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익숙하다’는 생각이 드는 주제를 골라 호기롭게 연구를 시작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난관에 봉착했습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생각들은 명쾌하게 정리되지 않은 채로 자꾸만 두리뭉실하게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는 것 같고, 읽어보면 좋을 듯한 문헌은 많은데 그중에서 정말 제가 하고 싶은 말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것을 솎아내기 어려워 갈피를 잡을 수 없었습니다. 아, 의기양양하게 대화에 참여했다가, 어리벙벙한 반쪽짜리 대답만 내놓고 있는 소크라테스의 대화 상대들이 이런 기분이었을까요? 

 

산파술(문답법)을 펼칠 때, 소크라테스는 크게 두 가지 역할을 맡는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한 가지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대화에 참여하는 상대방을 혼란스럽게 하는 ‘전기가오리’의 역할이고, 다른 한 가지는 상대방이 더 나은 인식 상태에 이를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역할입니다. 전자의 역할을 하는 소크라테스를 초대한 것이 저라면, 후자의 역할을 하는 소크라테스를 소개해 준 것은 중요한 문헌들을 추천해 주시고 난삽하게 길을 잃지 않도록 소중한 고견을 나누어주신 김현섭 지도 교수님, 그리고 그 문헌들 속에서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보여주는 학자들일 것입니다. 


산파술이 제게 인상 깊게 남았던 이유는 그 목표가 사람들을 ‘무언가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 ‘그것에 대해 실제로도 잘 아는 상태’로 이끄는 데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플라톤의 작품에 등장하는 소크라테스는 자신과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에게 정답이 무엇이라고 직접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비유하자면, 산파는 산파일 뿐, 산모의 아이를 대신 낳아주지는 못한다는 것이지요. 소크라테스에 의해 논파당하고 말문이 막힌 사람들은 ‘자신이 실은 잘 알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자각하는 상태에 이릅니다. 괴롭게, 괴롭게 이 상태에 도달한 사람들은 실은 모르는 것을 안다고 믿고 살던 때보다 인식적으로 더 나은 상태에 이른 동시에, 스스로의 (무지한) 처지에 대해서도 더 잘 알게 됩니다. 

 

아너스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저의 힘으로 연구를 진행해보는 값진 경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최종 원고를 탈고하고 난 뒤, 군데군데 빈 곳이 많더라도 내 손으로 ‘내 글’을 써보았다는 아주 자그마한 자부심이 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입니다. 이후 진행된 심포지엄은 준비한 원고를 다른 참가 학우들과 나누고, 프로그램 지도 교수님들의 고견을 들을 수 있었던 감사한 경험인 동시에, 한 학기 동안 진행한 연구를 정리하고 되돌아보는 시간이었습니다. 왜 이 연구주제를 골랐는지에 대한 설명을 정리하면서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소수자로서 살아가는 경험에 대해 일관적인 관심사를 가지고 있었음을 자각할 수 있었으며, 제가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무엇을 공부하고,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 사람인지를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는 계기였습니다. 제가 서 있는 자리를 정말로 알게 되었으니,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제는 정말 기꺼이 탐구하려고(『메논』, 84b)” 할 때입니다.  


* 제53호 인문대 소식지 '교수논단'에 게재될 글을 위와 같이 싣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