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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아너스 프로그램 수기 - 서양사학과 정한솔

2021-04-16l 조회수 843
연구제목: 7월 왕정 부르주아의 공공보건 담론과 위험한 계급의 탄생: 빌레르메와 프레지에를 중심으로 


서양사학과 정한솔
 

에 머무른 시간이 길어질수록 성장하기는커녕 내가 가려는 길이 맞는지, 나는 가치 있는 사람인지 의문만 깊어지게 마련입니다. 친구들과 만나더라도 예전에는 마냥 즐겁기만 했다면, 이제는 간간히 미래에 대한 불안이 담긴 하릴없는 한숨이 섞이곤 합니다. 인문학을 공부하는 학생이라면 양가적인 질문이 머리를 떠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그리고 내가 배우는 학문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새내기 때, 어느 술자리에서 삶과 인문학의 학부생 조교님께 당돌하게 질문했던 기억이 납니다. “조교님께서는 인문학이 무슨 쓸모가 있다고 생각하세요?” 조교님은 잠시 맥주잔을 바라보시더니 대답했지요. 인문학은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하느냐를 알려주는 학문이라고. 인문학을 배운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과는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게 되고, 그럴 수밖에 없다고.

5년도 넘게 지나 아너스 프로그램을 통해 졸업논문을 쓰면서, 거의 이백 년 전 사람들이 지구 반대편에서 생경한 언어로 남긴 책들과 씨름하는 제가 새삼스레 그 질문을 받는다면 어떤 답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해 보았습니다. “1840년에 프랑스인 두 명이 쓴 책들에 관해서 연구하는 게 무슨 쓸모가 있다고 생각하세요?”

아직 인문학에 관해서는 부끄러울 정도로 얕은 앎밖에 갖추지 못했지만, 누군가 묻는다면 마땅히 답을 해야겠지요. 일단 탐구의 과정은 하나의 떨림입니다. 나와는 완전히 다른 시대에 살아갔던, 다른 언어로 생각하고 말했던 사람들의 흔적이 내 손에서 엮여 한 편의 논문으로 완성되는 과정은 연구자 개인에게도 떨리는 일이지만, 나아가 완전히 이질적인 타자와 함께-떨리는’, 즉 공명하는 일이었습니다. 고백하자면 이 느낌은 대학에서 프랑스어를 배울 때 처음으로 다가왔습니다. 어느 여름날 밤 기숙사 건물 바깥을 서성이며 왠지 모르게 신이 났었지요. 내가 몽테스키외가 쓰던 언어를, 볼테르가 읊던 말을, 위고, 발자크, 졸라가 쓰던 글을 배우고 있다니, 마침내 그들의 방식대로 생각할 수 있다니!

물론 학문이 이러한 자기만족에 끝나서는 안 되겠지요. 인문학이 제게 남긴 가장 중요한 가르침은 앎과 삶이 다르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 이제야 조교님의 말을 조금은 이해하겠군요. 인문학은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에 관해서 묻기 때문에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에까지 문제를 제기합니다. 요컨대 역사의 보건학에 관한 학문은 없지만 보건학사는 존재합니다. 철학의 과학에 대하여는 말하기 어렵지만 과학철학은 어엿한 학문입니다. 우리는 과학사, 외교사, 정치사, 사회사, 전쟁사, 보건학사, 법제사를 공부할 수 있고, 사회철학, 정치철학, 과학철학, 법철학, 언어철학에 대해서 말합니다. 인문학은, 감히 말하자면, 무엇보다도 자유로운 앎이며 그렇기에 언제나 바깥으로 탈주하는 메타-’의 학문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앎의 궁극적 도달점은 우리의 삶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인문학의 쓸모를 묻는다면 시원스럽게 답할 수 없습니다. 누가 우리 삶의 쓸모에 관하여 단언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아너스 프로그램은 그 목적뿐만 아니라 과정을 통해서도 자유의 이념을 구현하고 있습니다. 일단 선발되고 나면 인문대학에서는 학업지원비만 지급할 뿐, 무엇을 연구할지, 어떠한 방법론을 사용할지, 어떤 책을 구입할지, 어떻게 논문을 구성할지, 누구에게 조언을 받을지 등 연구의 모든 부분은 오롯이 연구자에게 일임합니다. 그 덕분에 그 어느 때보다도 마음 편히, 그리고 자유롭게 연구에 몰두할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로 산출된 각양각색의 주제를 다룬 다채로운 글빛의 논문을 갖고 모여, 서로의 논문을 발표하고 또 비평하면서 앎의 지평을 넓혀나갑니다. 자그마한 조각들이 드넓은 벽면을 촘촘히 채워 모자이크를 만들어내듯, 일견 파편적인 우리의 논문들 역시 언젠가 진리라는 가장 아름다운 그림을 완성하는 어엿한 조각이 될 수 있으리라고 내심 기대해보는 이유입니다.

, 이제 제가 물었던 질문에 제가 답하면서 마무리 지어야겠군요. 저와는 다른 시공간에 살았던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통해 저의 관점을, 그리고 제가 살아가는 세계의 외연을 조금이나마 더듬어볼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질병을 구실로 타자를 비인간화했던 과정을 탐구하면서 우리는 어떠한가를 되물을 수 있었습니다. 앎이 어떻게 삶으로 이어지는지 그리고 이어져야 하는지 고민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 고민은 영영 끝날 수 없음을 절감했습니다.


* 제52호 인문대 소식지 '아너스 프로그램 수기'에 게재될 글을 위와 같이 싣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