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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사] 제1회 암곡학술상 시상식

2017-04-10l 조회수 3589



지난 4월 6일 목요일, 신양인문학술정보관 국제회의실에서 제1회 암곡학술상 시상식이 거행되었다. '암곡학술상'은 세계적인 생명과학자로 알려져 있는 신승일 교수의 기금 출연으로 제정된 학술상으로,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융합을 꾀하는 연구성과들을 중심으로 수여된다. 이태수 명예교수(철학과)의 특별 강연과 신승일 교수의 기념 축사가 있었다. 신승일 교수의 시상식 축사 전문을 싣는다.



서울대학교의 미래와 한국 지식인의 역할
 신승일(전 미국 알버트아인슈타인 의과대학 교수)

암곡학술상 제1회 시상식과 강연회에 자리를 함께 해주신 선후배 학자 여러분과 내빈 여러분께, 그리고 암곡학술상의 첫 번째 수상자이신 이태수 교수님께, 환영과 축하의 말씀을 드리게 되어 큰 영광입니다. 
바쁜 일정 중에도 참석해주신 성낙인 서울대학교 총장님과, 암곡학술상의 제호를 아름다운 글씨로 빛내주신 권숙일 대한민국학술원 회장님께도 감사 드립니다. 암곡학술기금 운영위원장을 맡아주신 조완규 전 서울대학교 총장님과, 운영위원으로 도와주신 손봉호 교수님께도 다시 한 번 감사 드립니다.  또한 암곡학술상의 실무위원회를 맡아주신 이주형 인문대학장님, 김성근 자연대학장님과 정병설 기획부학장님께도 깊이 감사 드립니다.
 
암곡학술상은 제가 오랫동안 갖고 있던 하나의 작은 꿈이 실현되는 것이어서, 오늘 큰 기대와 기쁨을 갖고 있습니다. 
 
지금부터 정확히 60년 전인 1957년 어느 봄날, 옛 동숭동 교정에서 입학식을 마치고 저는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1학년생이 되었습니다. 그때는 전쟁이 끝난 지 4년이 채 안 되어 전쟁의 후유증이 서울 곳곳에 남아 있었지만, 우리나라 학문의 최고봉이라고 자부하던 문리대의 신입생으로 벅찬 희망을 안고 매일 아침 초만원 전차를 타고 종로5가에서 내려 세느강으로 불린 하천을 따라 학교로 갔습니다.  화창한 봄, 동숭동 캠퍼스는 개나리와 라일락이 흐드러지게 피는 낭만적인 곳이었습니다. 그때 우리들은 물질적으로는 가난했지만, 식민통치와 전쟁으로 폐허가 된 나라를 일으켜 세워 일류국가를 건설하겠다는 신념과 이상으로 차 있었습니다.
저는 2학년을 마치고 군에 입대하였다가 복학했는데, 3학년을 마친 1962년 전액 장학금을 받고 미국 대학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근 이십 년이 흐른 1979년 봄 교환교수 자격으로 서울대에 잠시 돌아오게 되었는데, 이는 당시 자연대 학장으로 계시면서 교환교수 프로그램을 만드신 조완규 교수님(전 서울대학교 총장)의 권유를 따른 것이었습니다. 관악산에 둘러싸인 웅장하고 아름다운 서울대학교 종합캠퍼스는 옛 기억 속의 작은 동숭동 교정과는 사뭇 다른 곳이었습니다. 저는 그때 미국 의과대학의 유전학 교수였는데, 한 학기 동안 서울대에서 학부 4학년생과 대학원생을 가르치면서, 한 가지 꿈을 갖게 되었습니다. 언젠가는 한국 교육에 기여하는 의미 있는 일을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한국 학문의 대표적 요람인 서울대학교는 사회가 필요로 하는 전문지식인을 양성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순수 학문을 통하여 미래의 한국, 나아가서는 미래의 인류문화에 기여하는 세계의 대학교가 되어야 할 것이고, 그 흐름에 저의 작은 힘이나마 보태자는 생각이었습니다.
21세기 초 오늘의 세계는 과학기술의 발전과 지정학적 변화로 인하여 문명사적으로 중요한 전환점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 예가 저의 전공 분야인 생명과학의 발전입니다. 유전학의 발전으로 인하여, 생물계의 진화는 우발적 돌연변이의 자연선택 대신, DNA의 인위적 조작과 선택을 통하여 인간이 희망하는 방향으로 유도할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자연계에 존재하지 않던 완전히 새로운 생물체가 탄생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새로운 농축수산물이 개발되고 생산성이 증가하면, 기아문제가 해결되고 생활수준의 향상을 기대할 수 있으나, 다른 한편 생물 다양성의 저하로 지구적 대규모 참사의 가능성도 늘어나게 됩니다. 또한 인류는 암 등의 난치병을 정복하여 수명 연장을 기대할 수 있는 반면, 생명의 인위적인 연장으로 인한 노령화로 사회적 윤리적 문제가 대두할 것입니다. 장기적으로는 인간을 부분적으로 “개조”하거나 온전히 복제하는 것도 가능할 것인데, 이제 우생학적 기회와 유혹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가 진지하게 고려되어야 합니다.
또 다른 예는 IT 기술의 발전입니다. 인공지능이 발전하면서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기계가 나타나면, 인간을 기타 동물로부터 구별하는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란 과연 의미가 있는 것인가, 예술과 도덕의 영역은 인간만의 영역으로 남을 수 있을 것인가, 궁극적으로 인간성의 근본은 무엇인가, 등의 새로운 질문을 피할 수 없습니다. 탈산업화와 사회 규범의 변화로 인하여 종교적 신앙의 전통이 쇠퇴하면서 새로운 윤리체계가 요구되며, 국제화의 가속으로 민족과 국가 중심의 일원적 문화전통이 새로운 다원적, “다문화” 사회로 진화하고 있습니다. 
지정학적인 변화 또한 현실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18세기 산업혁명 이후 세계를 정치, 문화, 경제적으로 지배해 온 유럽 문명의 상대적 약화와, 제국주의의 몰락, 산업구조의 재편 등으로 20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동양문명권의 재 부상은 이미 상당히 진행되었습니다.  따라서 유럽과 북미를 중심으로 하는 “서구문명”과 중국, 한국, 일본을 아우르는 동아시아와 인도를 주축으로 하는 남아시아가 연계된 “동양문명”이 양대 축을 이루는, 새로운 동서 구도의 양극 체제가 정착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렇게 여러 분야에서 근본적이고 범지구적인 변화가 빠르게 전개되고 있는 새로운 세계에서, 한국 지식인의 역할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저는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암곡학술상에서 찾게 되기를 바랍니다. 역설적이지만 불확실성이 극대화된 이 시대에 오히려 새로운 한국문명의 가능성이 열리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는 조선 후기의 국가경영 실패로 인하여 아픈 근대사를 가졌지만, 지난 반세기 동안 서구의 과학기술과 산업체제를 짧은 기간에 압축적으로 차용하고 소화하여 현대화에 성공하였고, 그 성공을 바탕으로 한국 전통문화의 강점을 새롭게 인식할 수 있는 물질적 심리적 여유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새로운 “한국적 사고”의 창조가 가능해졌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은 세계 문명사에서 거의 유일하게, 2천 년에 걸쳐 강력한 중앙집권적 국가체제를 유지하면서도 불교와 유교, 그리고 기독교적인 전통을 모두 흡수하였고, 독자적인 언어와 문자를 가진 고유의 문화적 전통을 유지하는 데 성공한 나라입니다.
이제 한국의 지식인이 새로운 인류문명의 패러다임을 창조하는 장으로 나아가는 길을 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다면 새로운 한국적 지식인의 표상은 어떤 것인가? 조선시대의 진정한 선비는 정의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시류에 맞설 줄 아는 지조와 기개를 겸비하였고, 그러면서도 면면히 내려온 우리만의 풍류를 즐기는 내면의 여유도 갖고 있었습니다. 근대사의 피해자였던 한국의 지식인으로서, 우리가 새로운 장으로 나아가기 위하여는, 우선 서양문명에 대한 열등의식을 극복하고, 문화적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세계사적인 안목으로 역사를 인식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암곡학술상이 지향하는 바는 서울대학교에서 소양을 닦은 교수와 학생이 진정한 세계 속의 지식인으로 인류사회에 공헌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편협한 전문가로서가 아니라, 인문학의 전통을 이어받은 과학과 현대과학의 기초를 이해하는 인문학의 만남을 기반으로 한 창조적 융합의 결과로서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암곡학술상이 앞으로 과학과 인문학의 접목을 추구하는 토론의 장을 열고, 진정한 지성인의 성장을 돕는 일에 공헌하기를 바랍니다. 제1회 수상자이신 이태수 교수님의 강연이 불씨가 되어, 서울대학교에 새로운 학문적 전통의 여정이 시작되기 바랍니다.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2017년 4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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