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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제19회 송건호 언론상 수상 - 정용욱 교수 인터뷰

2021-02-25l 조회수 1932

제19회 송건호 언론상 수상 - 정용욱 교수 인터뷰

2020년 12월 22일 제19회 송건호 언론상 시상식이 열렸습니다. 수상자는 국사학과 정용욱 교수님입니다.
이 상을 주최하는 청암언론문화재단(청암재단) 보도자료에 따르면, 송건호 언론상은 언론 본연의 역할을 통해 사회 공헌과 언론민주화에 기여하여 청암 송건호 선생의 언론정신을 이어받았다고 판단되는 언론인, 한국근현대사 연구자, 지식인 등에게 수여됩니다.
2021년 1월, 수상을 축하드리며 수상자에 대한 인터뷰를 진행하였습니다.



인터뷰 진행: 고동현(국어국문학 박사과정), 이원섭(종교학과 석사과정)


  • 먼저 제19회 송건호 언론상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간단한 소감 말씀 부탁드립니다.

송건호 언론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 상은 현장을 지키는 언론인들이 받아야 한다고 평소에 생각했던 터라 처음엔 당황스럽고 받아도 되는지 송구스러웠습니다. 그런데 듣자하니 송건호 언론상 심사 위원회에서 이전부터 기자들뿐만 아니라 현대사 연구자들도 심사 대상자에 포함시켜서 심사를 해왔었다고 해요. 송건호 선생님이 여러분도 알다시피 한국 언론 민주화나 언론 자유화에서 중요한 활동을 많이 해 오셨던 분인데, 후배들한테 항상 역사 공부, 특히 한국현대사 공부를 강조하셨다고 합니다. 제가 대학에 들어왔던 197910월에 해방 전후사의 인식1권이 나왔고, 그 책에 실린 첫 번째 논문이 송건호 선생의 글이었어요. 저도 그것을 방학 시작하자마자 사서 읽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당시 판금상태였는데 어떻게 구했는지 모르겠어요.(웃음) 또한 수상 선정 이유에서 현대사 연구자뿐만 아니라 비판적 지식인으로서 자기 역할을 해왔었다는 점을 강조해 주셔서 저로서는 좀 의외였습니다. 저는 특별히 비판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해왔던 활동들이나 이런 것들을 사회 한편에서 유심히 본 분들도 있구나 싶어서 수상 선정 사유를 보고는 감사한 마음으로 받았습니다.

 

  • 해방 전후시기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해 오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특히 미군정기 연구에 천착하게 되신 계기가 궁금합니다.

특별히 미군정기를 제가 택한 것이라기보다는 한국현대사 연구가 한국사 학계에서 어떻게 발전해왔는가를 이해하셔야 하는데요. 예컨대 60-70년대까지만 해도 교과서도 그렇고 통사에서 집필의 하한은 3·1운동이었습니다. 그 이후 시기는 연구자들이 다루지 않았던 거죠. 그런데 한국에서 민주화운동이 성장하기 시작하면서 80년대 후반에 한국현대사 연구가 본격화되기 시작했거든요. 그 당시에 젊은 학자들이 현대사 연구에 대거 참여하기 시작했는데, 그때 현대사 연구는 그냥 해방 직후사연구였습니다. 6·25전쟁사 연구도 굉장히 드물었고요. 그냥 해방 직후사 연구가 현대사 연구의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제가 학사논문은 개항기를 썼고요, 석사논문은 일제 식민지 초엽의 경제사를 썼습니다. 지방금융조합이라고 일제 금융 침탈사, 농업 침탈사를 썼는데 그 당시에 저희 과에서 가장 뒷 시기를 연구한 셈입니다. 제 앞에 식민지기를 쓴 분이 두어 분 있었고요. 석사논문 쓰고 군대 다녀오니까 후배들이 한국현대사를 전공해야지 취직이 빨리된다고 그래서... (웃음)

그 후배들의 말처럼 되진 않았지만, 그래서 현대사 연구에 몸을 담기 시작했습니다. 우선 도전의식을 많이 느꼈고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당시 자료 상황과 연관이 있습니다. 그 당시 현대사 연구는 해방 직후사 연구인데, 해방 직후사를 전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미국 측 자료를 보지 않고서는 안 되겠다고 판단을 했어요. 그래서 91년에 가지고 있던 조그만 아파트를 팔아서 미국으로 갔어요. (웃음) 미국에 National Archives라고 국립문서관이 워싱턴DC 근교에 있는데, 거기에 가서 미군정 자료를 봐야겠다는 생각이 있어서요. 그 당시 박사과정까지 수료했는데 다시 유학을 갈 순 없었고, 비자받기도 어려웠어요. 요새야 3개월은 쉽게 체류할 수 있지만, 그 당시는 단 며칠을 나가더라도 비자를 받아야 되는 상황이라 하버드 대학의 한 교수님한테 편지를 썼죠. 내가 자료를 보러 가야 하는데 나를 객원연구원으로 초대해줄 수 있겠냐. 어떻게 얘기가 잘 돼서 하버드에 가서 6개월 지내다가 워싱턴DC에 가서 한 1년 동안 자료만 봤어요. 그 당시에 국사학과 선후배들은 대부분 규장각에서 자료볼 땐데, 저는 외국의 문서고에서 자료 조사와 연구를 하게 되었죠.

거기서 초청을 받았지만 비용까지 대주는 것은 아니었고, 경제적으로는 조금 힘들었지만 일종의 사명의식 같은 것이 있었던 것 같아요. 나도 자료를 좀 보고 국내의 연구자들한테도 보급을 해야 한다, 지금이야 전부 디지털 카메라로 찍어오면 되지만, 그 당시에는 문서를 일일이 복사를 해야 했고 비용이 꽤 들었거든요. 그래서 귀국할 때에도 짐의 대부분을 자료 박스들로 채워 왔고, 이후 몇 종류의 자료집으로 만들어서 90년대 전반, 중반에 출판을 했습니다. 그 자료집이 한 40-50권 될 텐데요, 미군정 시기에 주제적 관심이 있었다기보다는 그 당시 현대사 연구는 미군정기 연구였고, 제 경우에는 미국 자료를 봐야한다는 절박한 필요가 있어서 그 시대를 전공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시기도 해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제 성격이 좀 완벽주의라 쉽게 못 내려오고 있네요. 그런데 앞으로는 좀 하려고요.

 

거의 선두주자로 이 분야를 개척해 오신 셈이네요.

, 사실은 아까 얘기했듯이 후배들 가운데, 나보다 더 앞장서서 현대사 연구를 한 우수한 후배들이 많이 있었어요. 처음에 공부할 때는 후배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어쨌든 저는 그 당시 사립대학의 연구소 연구원으로 있었는데, 그렇게 있어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 도미를 결심했고, 비교적 선구적으로 오랜 시간 아카이브 리서치를 한 셈이 되었습니다.

 

얘기만 들어도 고생을 많이 하셨을 것 같습니다.

경제적으로 좀 힘들고 그랬는데, 제 연구 경력에서 제일 긴장된 시기이기도 하고 의미 있는 시간이었던 것 같아요. 그렇게 통째로 자료만 보면서 공부하는 것은 굉장히 행복한 거죠.

 

  • 현대사는 전근대사에 비해 현실 사회의 정치적인 문제와 긴밀히 연관된다는 점에서 역사가로서의 소명의식과 신념이 더욱 요구되는 분야라고 생각합니다. 특별히 힘들거나 어려운 점은 없으신지요?

연구자로서는 어려움이 확실히 좀 있습니다. 서울 시내 대학에서 한국현대사 관련 전임교수를 뽑은 것이 아마 90년대 중후반부터일 거예요. 그러니까 그 이전에는 현대사가 한국사에서 시민권이 없었던 겁니다. 이것은 다른 나라와 비교해보면 굉장히 이상한 현상입니다. 지금은 한국사 교과서가 전근대사, 근현대사 두 권으로 나와 양적 비중이 각각 5:5가 됩니다. 근데 제가 어렸을 때 중학교고등학교 교과서는 3·1운동이 하한이었어요. 전근대사와 근현대사의 비율이 7:3, 8:2였어요. 근현대사 교육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었던 거죠. 그러니까 우선 대학교에서 교수가 없는 겁니다. 제가 논문심사 받을 때에도 조선시대사 전공하시는 저희 과 선생님들 세 분 들어오셨고, 근대사 한 분 들어오셨고 이런 식이었어요. 연구자로서 현대사 연구는 특히 초창기에는 어려움이 많았죠. 지금이야 많은 대학에 현대사 교수가 있는 셈이죠.

이 질문은 아마 현대사가 현재와 직접 연결되는 시기이고 한국 사회의 경우 분단 문제나 이데올로기 대립 문제 같은 것이 남아 있으니까 이와 연결되어서 그렇지 않은가 싶은데, 저는 그런 건 잠시 놔두고 어쨌든 역사가는 그 이전에 지식인이라고 생각해요. 물론 훨씬 더 예민한 시기이고 정치적 사안에 대해 발언해야 할 때가 많고 그렇긴 한데, 특별히 다른 시대사와 다른 소명의식이나 신념의 차이를 강조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역사가 이전에 지식인이라면 그에게 비판적 성찰은 기본적 자세이자 태도라고 할 수 있겠죠.

비판이라는 부분이 앞에 들어가는데, 예를 들어 서울대 와서 제일 먼저 겪은 일 중 하나가 황우석 사태인데요, 황우석 사태 때도 연구진실성 문제나 연구윤리 부분에 대해서 단호하게 대응해야 한다는 학내 목소리가 있었는데, 저도 그분들과 생각을 같이 했어요. 그 당시 언론의 보도 태도를 보면 황우석이 블루 오션을 열어 젖혔다면서 정부는 물론이고 언론도 말도 못하게 키워주고 그랬는데, 그러다가 젓가락 조작이 발견된 거잖아요. 처음에는 그것을 보도한 시사 프로그램 PD를 묵사발 만들어 버리는 분위기였어요. 심지어 본교의 어떤 교수님조차도 PD를 공격하는 칼럼을 보수신문에 쓰셨고요. 학계에서는 황우석이 뭔가 연구 조작을 하고 있지 않느냐는 소문이 있었고 특히 젊은 연구자들 같은 경우에 그 부분을 당연히 조사해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러다가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니까 어쩔 수 없이 연구진실성위원회를 만들어서 조사하기 시작했거든요. 그것은 저한테 좀 충격적이었어요. 왜냐하면 연구자들이 연구만 하고 실험만 하면 되는 줄 알았더니, 좀 더 많은 연구비를 따내기 위해서 조작도 하는구나 하는 것이 충격이었고요. 다른 측면에서는 학문 사회조차도 사회적 감시나 개입이 필요하구나, 학문도 상아탑 속에서 혼자 고고하게 존립하는 것이 아니구나 하는데 생각이 미쳤어요. 황우석 씨가 해온 실험과 연구는 평소에는 보통사람들과 거의 관련이 없는 문제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가 개입을 해야 하는구나 하는 데 생각이 미쳤어요.

또 하나는 황우석 씨가 연구비 3억을 가지고 가면, 3천만 원만 있어도 의미 있는 기초연구를 할 수 있는 연구자들 10명이 연구비를 못 받는 경우가 생겨요. 연구비가 무한정으로 있어서 기초연구를 하는 사람도 주고 산업으로 발전시키는 분야도 다 주면 좋은데, 그렇지 않으니 이쪽에서 싹 쓸어 가면 저쪽으로는 안 오는 거죠. 특히 자연과학 쪽은 실험이나 실습을 반드시 해야 하는데, 연구비가 없으면 못하는 거잖아요. 이것은 사회적 문제일 뿐만 아니라 대학의 문제이고 학문의 문제이기도 하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저는 지식인은 학문적 문제, 사회적 문제와 결코 동떨어진 존재가 아니고, 이런 부분에 대해서 자기 발언을 해야 되고 자기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석사 끝나고 박사 들어가기 전에 계몽사에서 나오는 만화 한국사 열 몇 권 중 한 권의 스크립트를 써줬던 적이 있는데, 다른 나라의 역사 교과서들을 한번 비교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어요. 미국은 전근대사가 없었기 때문에 논외로 하더라도, 프랑스나 영국의 자국사 교과서는요, 근현대가 60-70%예요. 전근대가 30-40%예요. 역사가 어떤 면에서 보면 교훈 찾기고, 사실 이데올로기 문제와 관련이 있죠. 프랑스는 프랑스대혁명이 워낙 중요하니까 프랑스대혁명을 중심으로 그 이후에 자유, 평등, 박애가 어떻게 자기 나라에서 실현됐는가를 중심으로 근현대사를 구성하는 거죠. 그리고 역사적으로 봐도 현대 1년이 선사시대 1000년보다 발전을 더 많이 하죠. 그럼 그쪽이 많아야 되잖아요. 그런데 한국이 민주화되기 이전의 교과서는 전근대가 70-80%, 근현대가 20-30%였어요. 이건 굉장히 불균형한 역사 인식을 학생들한테 강요하고 있는 거죠. 그 당시 만화 한국사의 양대 산맥은 웅진출판사와 계몽출판사였어요. 만화 한국사는 젊은 사람들이 많이 참여했는데, 양쪽 출판사 둘 다 근현대사 분량을 많이 늘렸어요.

다행히 저희 과는 80년대 후반부터 원로 교수님들이 존경스럽게도 현대사 강의를 개설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아요. 할 사람이 없는데도 같이 그냥 한 거예요. 조선시대사를 전공한 선생님이 현대사 과목을 개설해서 같이 한 거죠. 대학원생들이 발표하면, 선생님이 논평하고 이런 식으로 강의를 진행했어요. 학과에서 현대사 자리를 확보하지 못하자 선생님들이 고심 끝에 조선시대사를 전공하시던 선생님이 퇴직하신 다음에 그 자리를 조선시대를 뽑지 말고 현대사를 뽑자고 결정했어요. 그래서 2003년에 처음 현대사 교수로 제가 부임을 했거든요. 학과 나름대로 그런 노력이 좀 있었어요.

그래서 저는 역사학이 제대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현대사 부분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을 학과 내에서도 선생님들이나 학생들한테 강조해요. 역사가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얘기를 하는데 현대를 알려면 현대사가 정리가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거죠. 내가 어떤 위치에서 질문을 던지는가가 굉장히 중요하기에 현대사 정리가 되어야 하는 거죠. 그래서 저는 학문 내적인 의미에서 역사학의 경우 현대사 연구가 중요하다는 것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강조하고 있고요, 다행히 제가 온 다음에 제 제자들이 지금 공부하고 있는 친구들까지 해서 30명이 넘어요. 아직 교수가 된 사람은 4-5명밖에 안 되지만요. 대학원생들을 키우는 데 노력을 많이 했어요. 현대사 연구자를 많이 배출해야지 한국사학이 균형 잡히게 발전할 수 있다는 게 기본적인 생각이에요.

전근대사와 다른 정치적인 소명의식이나 신념의 차이를 얘기하기 전에, 양자가 같이 공통적으로 노력할 점이 많다고 얘기를 드리고 싶고요. 특히 한국의 근현대 사회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정치적 문화나 역사적 전통 때문에 정치적 발언을 해야 할 때가 다른 시대사보다 많은 것은 사실인 것 같아요. 피하려고 하지 않았고요. 하지만 강조하고 싶은 것은 역사학이 정치적 논쟁으로부터 학문적으로 독립해야 한다는 거예요. 한국현대사가 논란이 될 때 항상 정통성 논리를 끌고 나오잖아요. 그리고 그것은 분단 이후 어느 한 편에 서있는가를 자기 정통성의 기반으로 삼고 있는데, 그런 논의로는 우리 사회가 결코 발전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저는 정치적 발언을 해야 할 때도 내가 어느 당파의 입장에서 발언하기보다는 정치에 역사를 끌어들이는 것이 왜 잘못이고, 그 경우 그런 논란이 얼마나 편협한 역사적 사고를 국민들에게 강요하는 것인지, 또 역사학을 황폐화시키게 되는지를 강조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정치에 관여할 때도 정치와 일정한 거리두기를 하면서 학문적 독립성을 확보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황우석 사태도 비슷해요. 학교가 독자적인 학문정책을 가지고 있어야 되는 거예요. 나라에서 황우석한테 돈을 주겠다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학교에 있는 분들은 기초연구도 해야 된다는 것을 알고 있고, 어떤 연구는 3천만 원만 줘도 좋은 연구 성과가 나온다는 것을 알고 있죠. 그러면 황우석한테만 몰아주지 말고 기초연구 쪽에도 줘야 되는 거예요. 그러려면 서울대가 자기 입장을 갖고 있어야 되는 거죠. 이것은 꼭 역사 문제만은 아닌 것 같아요. 정치에 개입할 때는 개입해야 하지만, 정치와의 거리두기나 대학의 독자성, 학문적 독립성 확보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학문의 독립성 확보라는 것이 학문의 영역을 확보해 놓고 정치적인 발언이 필요할 때는 개입할 수 있는 환경을 말씀하신 것이 맞나요?

그렇죠. 정치적 판단을 내릴 수도 있고 학문적 판단을 내릴 수도 있잖아요. 논의를 자꾸 좌우 대립으로 몰아가면 학문이 설 자리가 없는 거죠. 그러면 학문적 논의를 자기한테 더 유리하게 해석하고 결국에는 정치적으로 소비를 해버리게 되죠. 좌파의 주장이 뭐고 우파의 주장이 무엇인지 학문적으로 답해야 하죠. 동시에 그 논의가 가지고 있는 비역사성이나 잘못된 인식태도는 비판을 해줘야 되요. 명백한 사실적 오류나 허위주장을 하는 것은 지적을 해야 하는 거죠. 다른 한편으로 어떻게 역사적 평가를 안 할 수가 있습니까. 이러저러한 조건에서 볼 때 누가 옳고 누가 그르다는 것을 분석해줘야 되는 거죠. 역사적 판단을 안 하겠다는 얘기가 아니라 학문이 거리두기를 하면서 그런 부분에 접근을 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 지금까지 한국현대사’ 관련 강의를 해 오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수업을 통해 학생들에게 가장 강조하시는 내용은 무엇인가요?

얼마나 어려운 과정을 거쳐서 서울대에 들어옵니까? 그런데 갈수록 학부생들에게 공부하는 법에 대해서 얘기할 기회가 많아져요. 학생들은 강의를 역사지식을 습득하는 기회로 여기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제 강의에서는 역사 공부는 자기를 상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라고 강조해요. 역사가로서 사료를 조사하고, 연구하고, 해석해서 글을 쓰는 것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가 연구하는 대상과 자기 사이의 거리두기가 필요하죠. 이승만이 되었든, 김구가 되었든, 박헌영이 되었든 그들과 그들의 시대를 연구할 때 이승만이 무조건 옳다, 박헌영이 무조건 옳다 그러면 안 되고, 왜 자기가 그런 식의 해석을 내리는가에 대해서 자기 검증이나 자기 논리를 객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죠. 왜 다른 사람은 저렇게 얘기하는데 나는 왜 이렇게밖에 얘기할 수 없나를 살펴보며 자기를 상대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는 거죠. 그래야지 비로소 역사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해요. 그래서 역사공부는 자기를 상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라는 점을 첫째로 강조하고 있는 겁니다.

그 다음에 학생들이 이상하게 활자로 된 것에 대한 맹목적 믿음이 있어요. 논문, , 사료에 나오는 얘기에도 잘못과 오류가 많고 조작적인 정보들도 많습니다. 그래서 그것들에 비판적으로 접근하라고 강조해요. ‘회의하라, 회의하라, 끝까지 회의하다가 마지막에 주체적으로 사고하자는 것이죠. 대학원생들한테는 다른 방식으로 임해요. 굉장히 엄격하게 훈련을 시키려고 해요. 자기 훈련이 있어야지 학자로서 성장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심지어 석사과정 처음 들어오는 학생들한테는 너희들은 금수다. 100일 동안 쑥과 마늘을 먹으면서 내 밑에서 눈물 몇 번 흘리고 나면 인간으로 환생할 수 있다.’고 말해요.(웃음) 그래서 석사 초기에는 독서도 많이 시키고, 글을 제대로 써오지 않으면 야단치고 하면서 자기 훈련을 시키죠. 또 하나는 어깨(너머)공부를 많이 강조해요. ‘동료나 선후배가 어떤 공부를 하는지 한 번 봐라. 공부라는 게 고시공부 하듯이 자기 담 쌓아놓고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주위의 네 친구들이 무슨 생각하는지 알아야 되는 거다.’ 이렇게 자기 훈련하고 동료들과의 토론을 강조합니다. 그 과정에서 자기 한계를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라. 상호비판이 가능해야지 너도 크고 학계도 큰다.’고 말해요. 이게 좀 된다면 여분으로 학문적 동지애를 강조합니다.(웃음)

 

  • 오랫동안 강의를 해오시면서 변화된 수업 방식이나 관점이 있으신가요?

옛날에는 수업시간에 질문을 툭 던지면 예리하게 되받는 친구들이 있었어요. 그러면 저도 같이 긴장하게 되고 토론이 밀도가 있어지면서 학생들이 따라오거든요. 그럼 그 수업은 성공이죠. 그런데 요새는 그게 잘 안돼요. 학생들이 받아 적기에 급급하죠. 그래서 제가 선호하는 방식은 질의 토론이나 집중토론이에요. 제가 질문하고, 요새 대답을 잘 안하니 지명해가지고 전부 발언시키고, 토론을 해볼 만한 주제가 나오면 집중토론을 합니다. 교양수업은 제가 강의를 하는데 전공수업은 수업의 후반부를 조별 발표로 해요. 조별 발표로 하면은 자기들끼리 모여서 토론을 할 테니까 그게 도움이 되죠. 옛날에는 부담을 안 가지고 했었는데 요새는 조별로 발제를 시키면 부담스러워 하는 학생들이 많아요. 경영대 같은 곳은 과제를 주로 조별로 많이 하는데, 인문대 학생들은 굉장히 불편해 하고 그래요. 공부하는 방식이 옛날에 비해서 많이 달라진 것 같아요. 인터넷에서 지식을 쉽게 검색할 수 있고, 훨씬 다양하고 풍부한 지식들을 끌어낼 수 있잖아요. 그런데 그것을 역사적인 사유를 통해서 더 풍부하게 만들고 창조적인 작품으로 만드는 훈련을 대학이 해줘야 하는데 이것이 잘 안 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자기에게 필요한 정보를 잘 찾아내는 것도 좋지만, 자기가 찾아낸 것을 어떻게 창조적으로 형상화할 것인가, 또 자신이 찾아낸 것이 얼마나 일면적일 수 있나, 즉 자신의 사고를 상대화시킬 수 있는 기회,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합리적인 사유방식을 대학이 자꾸 길러줘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것은 다른 방법이 없어요. 많이 읽히고 토론을 많이 시키는 수밖에 없거든요. 그래서 그것을 강조하고 있죠. 그런데 학생들이 이런 식의 방법에 대해서 점점 더 어려워하고 거부감을 가지고 있어서 고민을 많이 하게 됩니다.

 

  • 2015년에 한창 국정 교과서’ 관련 사안이 뜨거웠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역사인식과 권력, 정치와의 관계를 생각할 때 놓치지 말아야 할 핵심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한국역사연구회라고 국내의 한국사 관련학회 중에 가장 큰 단체입니다. 한국사 관련 학회들은 일정한 역사성을 가지고 있는데, 50년대 진단학회가 만들어졌고, 60년대 후반에 한국사연구회라고 해서 그 당시 젊은 연구자들이 새로 만들었고요, 80년대 후반에 한국역사연구회가 만들어졌는데 회원 700-800명 중에 교수가 절반이 넘는 굉장히 큰 단체입니다. 공교롭게도 제가 2015년에 회장을 하게 됐습니다. 그 이전에 2013년 교학사 교과서 문제가 있었잖아요. 교학사 교과서가 0%대의 채택률을 보이며 중등학교에서 거의 퇴출되다시피 하자 정부가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로 갈 것이라는 예상들을 한국사 학계가 하고 있었기 때문에 연구자들이 긴장하고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2015년에 와서 미리 준비한 듯이 착착진행하는 거예요. 우리도 착착대응할 수밖에 없었죠.

원래 2008년인가 2009년까지는 국정교과서였어요. 2007년에 검인정교과서 검정기준이 만들어지고요, 2009년부턴가 검인정교과서가 처음 나왔을 겁니다. 1980년대 후반에 우리 사회가 민주화된 다음에 90년대 이후부터 2008년까지 한국사는 국정교과서 상하권으로 배웠어요. 그런데 그 당시 국정교과서를 보면 검인정교과서보다 못하지 않아요.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필자로 동원됐고, 80년대 이후 성장한 젊은 연구자들도 부분적으로 많이 참여하고 해서요, 내용도 풍부하고 잘 만들었죠. 그래도 더 다양한 목소리를 역사 교육에 동원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검인정으로 간 거거든요. 그런데 검인정을 악용해서 뉴라이트 교과서 같은 것을 통과시키니까 문제가 되었던 거죠. 그 당시에 역사학계가 그렇게 대동단결해서 정부에 비판적인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것은 국정교과서에 수록될 내용이나 역사 인식도 문제였지만 진행 과정 자체가 무엇보다 비민주적이었기 때문이에요. 절차적인 민주주의도 제대로 지키지 않고, 교과서에 담으려는 내용이 학계의 공통된 의견으로부터 너무 멀리 벗어나 있었죠. 이 두 가지가 연구자들한테 비판의 목소리를 내지 않을 수 없게끔 만들었죠.

역사학계, 역사교육계, 시민사회와 함께 반대 투쟁을 벌이면서 새삼스럽게 깨우친 점도 있습니다. 그 당시에 대책위원회가 만들어져서 국민들에게 역사교과서 국정화의 문제점들을 알리는 홍보라 할까요, 선전활동을 많이 했지요. 그 과정에서 교과서 편찬을 다른 나라에서는 어떻게 하고 있는지를 같이 조사했는데, 교과서 문제를 인권의 문제로 생각하는 나라가 많은 거예요. 교육을 받을 권리, 특히 올바른 역사적 내용으로 교육받을 권리를 인권 차원에서 다루는 거죠. 심지어 굉장히 실험적인 경우의 하나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이 공통으로 교과서를 만들었는데, 어떤 식으로 썼냐하면, 이스라엘 학자들이 쓴 부분, 팔레스타인 학자들 쓴 부분, 그리고 백지로 된 나머지 한 부분, 합해서 세 부분으로 교과서를 만든 거예요. 백지로 된 부분은 수업을 받는 학생들이 각자 써보는 공간으로 놔둔 거죠. 그 교과서를 만든 이들은 역사교과서를 서로 적대하는 양 지역의 학자와 교사, 학생들이 함께 공통의 역사를 만들어가는 과정으로 생각한 거예요, 서로 다른 관점을 이해해야 한다는 뜻으로 그런 시도를 같이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학생들의 교육받을 권리, 교재나 이런 것에 수용자들이 참여할 권리를 인권의 차원에서 보장해야 한다고 생각한 거죠.

타국의 사례들을 보면서 대책위원회에서 한국의 국정교과서 문제가 교육의 권리를 침해하고 있다는 보고서를 작성해서 UN인권위원회에 보냈어요. 정치세력이 자신의 역사인식을 수용자들에게 강요하는 방식으로 교과서 편찬이 이뤄지는 거잖아요. 이것에 대해서 반대할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다른 역사연구자들, 역사교사들, 시민사회와 같이 싸워나가면서 이게 단순히 역사인식의 문제나 교과서 편찬 제도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보다 기본적으로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의 발전, 인권의식의 고양이나 인권문제와도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게 되었고, 그것을 여러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었던 것은 저한테는 새로운 경험이었습니다. 당시 연구자들이 이런 식의 사고를 공유하면서 대동단결해서 같이 싸워주었고, 학생들과 대학원생들도 열심히 싸워주어서 그분들에게 고마워하고 있습니다.

 

  • 최근 몇 년 동안은 정보의 홍수 속에서 가짜뉴스에 대한 분별, ‘fact’에 관한 부분이 주요해졌다고 봅니다. 이와 같은 객관성의 문제에 있어서 역사적 사고를 통해 얻을 수 있는 통찰이 있을까요?

먼저 얘기해 둘 것은요. 어떤 사실이 객관적이다 할 때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 중에 하나가 가장 중립적인 것이 가장 객관적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사실에 있어서 그런 경우는 거의 없다고 생각해요. 객관성의 경우에 반대되는 것은 당파성의 문제일 텐데 가짜뉴스가 문제되는 것은 사실을 조작하면서까지 자기의 당파성을 관철시키려고 할 때이죠. 이 문제와 관련해서 생각한 것은 우리가 진실에 어떻게 다가갈 수 있을까 하는 거예요. 역사가의 경우에는 항상 사료 조작과 싸우게 되잖아요. 최근에 한국 사회의 미디어 환경이 많이 바뀌었고, 특히 인터넷과 디지털 기반으로 가면서 기술적으로 많은 부분이 바뀌었지만, 전반적인 언론 환경은 오히려 악화된 것 같아요. 기술적 진보가 오히려 가짜뉴스가 횡행할 수 있게 만든 거죠. 제 생각에는 이제 미디어 리터러시를 강화할 수 있는 훈련을 학교나 우리 시민사회가 해야 할 것 같아요. 특히 학교에서. 이 문제의 철학적 토대는 객관성과 당파성의 문제이지만 개인적 차원에서는 사실과 조작을 구별해 내고 그 기획이 가지고 있는 정치적 의도까지 간파해 낼 수 있는 미디어 리터러시에 대한 훈련이 필요하다고 얘기하고 싶고요.

사회적 차원에서는 이런 조작이나 기만이 설 자리가 없도록 시민사회가 감시하고 참여해야 합니다. 진실은 구성되는 것이지 어떤 절대적인 진실이 있어서 그것을 우리가 파악할 수 있냐 없느냐 하는 문제는 아닌 것 같아요. 어떤 것이 그 당시에 옳았지만 역사적 사실이나 환경이 바뀌면 옳지 않게 되는 것도 많잖아요. 지식과 정보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조작이나 기만이 설 자리가 없도록 사회적 차원에서 감시하고 참여해야 된다, 그리고 절차나 방법을 제도화시키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에요.

사실 이 문제는 역사학자에게는 최근 굉장히 곤혹스러운 문제를 제기합니다. 최근 탈진실’(post-truth)이라는 용어가 점차 정착되고 있잖아요. 이번 학기 대학신문 종간호에 탈진실 시대의 앎과 실천이라는 칼럼을 썼는데, 사람들이 자신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사실 자체를 조작하거나 사실 자체를 부정하는 거죠. 일본 정부의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태도가 그렇지요. ‘위안부문제에 대해서 역사수정주의가 강제가 없었다고 주장했다면 이제는 그것에서 더 나아가 위안부가 없었다고 얘기를 하는 거예요. 역사 자체를 부정하는 거죠. 유럽에서는 홀로코스트는 없었다고 주장하는 영국의 한 학자가 오스트리아에 여행 갔다가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감옥에 간 사건이 있었어요. 그 학자는 홀로코스트가 없었다고 주장하죠. 트럼프 지지자들 가운데 일부는 코로나는 음모라고 얘기하며 마스크도 쓰지 않죠. 자기가 하는 정치적 행위가 올바르다는 신념에서 객관적인 사실 자체도 부정하죠. 전 세계 많은 사회들이 사회경제적으로 양극화되어 있을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양극화되어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에요. 이것은 어느 한편이 옳고 그르다고 판단해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길고 어려운 과정이겠지만 서로 대화하고, 서로의 오류를 발견해 내는 과정을 통해 극복해야 한다고 봐요. 그럴 준비가 되어 있느냐, 아니냐가 문제인데 그렇지만 이 방법밖에 없는 거죠. 역사학자에게도 탈진실 시대에 역사학이 어떻게 역사적인 객관성, 진실을 확보할 것인가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 2019년에 연재하신 칼럼 <편지로 읽는 현대사>를 보았습니다. 개인의 편지를 사료로 활용하여 풀어내어 여러 주체들의 목소리를 들어보는 것이 흥미로웠습니다. 이와 같은 연구의 주요한 점은 무엇인가요?

오래 전부터 이런 종류의 글쓰기를 해보고 싶었어요. 학문적 주장을 학술논문으로 발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회가 되면 수준 높은 교양서, 대중들도 읽을 수 있는 책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는데, 2019년에 신문 연재를 통해서 시도할 기회가 있었죠. 책으로까지 발전시켜야겠다고 생각을 한 것은 사실 2016, 2017년에 촛불혁명을 보면서였어요. 주말마다 거리로 150, 200만이 나오는 거잖아요. 원래 시위문화가 발달해 있었고, 2002년 월드컵이 그랬죠. 저는 당시 연구년이라 미국에 있었는데 후배가 어느 날 새벽에 전화를 해서 지금 난리가 아니다. 지금 한국에 되는 일이 없다. 전부 거리에 나와 있다. TV 좀 봐라.’라고 말했죠. (웃음) 너무 놀라웠어요. 2002년에 또 노무현 대통령 탄핵을 반대하는 촛불집회가 있었잖아요. 미군 장갑차 때문에 죽은 효순, 미선이 사건이 있었고. 그래서 제가 촛불혁명을 보면서요, 저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데 무슨 생각으로 저렇게 나올까. 그리고 해방 직후에도 아마 많은 사람들이 저랬을 텐데 그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우리가 해방 직후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좌우대립을 통과해야 되고, 민간인 학살문제라든지 국가 폭력 문제라든지 우리 사회의 과거의 어두운 측면들을 반추하지 않고서는 해방 정국으로 다가갈 수 없는 것이 현재의 상황인데 저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가지고 나온 걸까. 삼삼오오 가족끼리 나온 분들이 뭐 대단한 정치적 신념 때문에 나온 거겠어요? 나라 돌아가는 꼴이 한심하니까 자기라도 촛불 하나 밝혀서 바로잡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나온 거겠죠. 해방 직후 시기도 그랬을 거 같고, 그렇다면 거리로 쏟아져 나온 저 분들에게 그 원형(原形)의 역사를 돌려줘야 한다, 저 분들도 공감할 수 있게 해방 직후 거리로 나왔던 분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다행히 제가 미국 내셔널 아카이브에 왔다 갔다 하면서 편지 자료나 일기 자료 같은 것을 보는 족족 모아놨어요. 한국사 교과서를 보면 전근대시대의 주어는 대개 누구누구 왕이에요. 근현대는 주로 우리 민족이죠. 그런데 우리 민족 안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고, 전근대도 왕만 있는 것이 아니죠. 역사학자들이 80-90년 후반 이래 역사 발전의 주체를 민중이라든지 다양한 구성원으로 확장하는 작업을 해왔는데 더 나가서 역사서술의 주체를 확장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역사 활동의 주체뿐만 아니라 역사를 서술하는 후대의 우리의 관점을 훨씬 다양화시킬 필요가 있다고 봐요. 독일에서 사회사하는 분들이 70-80년대에 역사작업장 운동이라고 해서 일반인들이 같이 모여서 역사를 써보는 활동을 했었거든요. 우리도 서술의 주체를 다양화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다양한 자료가 필요하죠. 미국의 대한정책을 가지고 박사학위 논문을 썼는데 외교문서를 보면 거짓말을 너무 많이 해요.(웃음) 그래서 보통의 한국 사람들이 보는 해방 정국은 어떤 걸까, 역사학계에서는 편지나 일기 같은 자료를 에고도큐먼트’(ego-document)라고 하는데 이걸 이용해서 써봐야겠다고 생각했죠.

그러니까 민주화 이후 우리 사회의 역사의식의 발전이나 국민들의 행동 양식의 진화가 하나의 계기였고, 역사 연구자로서 역사 서술 주체를 다양화해야 한다는 제 생각이 다른 하나의 계기였으며, 다행히 보통사람들의 인식이나 생각을 보여줄 수 있는 자료들을 발굴해서 가지고 있었고. 그 세 가지가 합쳐졌죠.

 

  • 코로나19 상황이 2021년에도 한동안 지속되어 영향을 줄듯합니다. 향후 연구 목표와 계획은 무엇입니까?

방금 말씀 드린 시도를 6·25전쟁기, 일제 강점기에 대해서도 한번 해보고 싶어요. 수준 있는 교양서이지만 일반 독자들도 같이 호흡할 수 있고 그들을 대상 독자로 하는 글쓰기를 한두 해 더 하고 싶습니다. 소재나 자료들도 있고 구상도 좀 있어요. 또 하나는 미국 국립문서관에, 6·25전쟁기에 미군이 노획한 북한 문서들이 한 6000 문서상자 정도 있어요. 4500여 개는 평양주재 러시아 대사관에서 노획한 것인데 러시아어여서 제가 할 수는 없고, 나머지 한 1500개 정도를 대학원생들과 같이 목록을 만들어놨어요. 이 목록을 발간하고 자료들 해제집을 만들어 보고 싶어요. 그리고 당분간은 6·25전쟁기 심리전과 사학사에 집중하고 싶습니다. 이 주제는 냉전문화와 반공주의의 형성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한국의 인문사회과학이나 미국의 인문사회과학에서 냉전의 과학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그것을 좀 살펴보려고 해요.

 

  • 마지막으로, 당부의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이 자리에서 제가 할 말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사회가 급격히 변화하고 있죠. 대학도 커다란 전환기인 것 같아요. 서울대를 비롯해 한국의 대학들이 4차 산업혁명에 필요한 지식과 기술을 만들어 내는 것은 잘할 것으로 봐요. 그런데 대학이 첨단기술에 필요한 새로운 지식 생산에 앞장서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것을 우리 사회가 어떻게 관리해야 할지, 그리고 그것과 학문의 관계는 어떻게 설정해야 할지 등에 대해서 더 많이 고민하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대학이 지식 거간꾼이나 장사꾼에 머물러서는 안 되고, 지식공동체로서 나름대로 독자적인 학문적 입장이나 태도를 가지면서 권력이나 사회와 관계를 맺어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대학의 두 주체인 교수와 학생이 학문공동체의 발전을 위해서 각자 자기 역할을 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라도 대학이 연구와 교육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적 문제에 대해서도 뚜렷한 원칙을 가지고 대응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요새 가끔 학생들이 저를 인강 강사이상으로 바라볼까하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어요. 단순히 지식의 전달자나 생산자, 또는 지식의 소비자가 아니라 교학상장(敎學相長) 하는 과정에서 대학의 두 주체가 더 나은 학문공동체를 만들어나가고, 또 그 과정에서 생성된 지식과 정보가 우리 사회의 공동의 선을 위해 공유되는 그런 대학을 만들어 갔으면 합니다.




* 본 인터뷰는 제52호 인문대 소식지 '교수논단'에 요약되어 실릴 예정입니다.